에세이 ‘딸의 기억’
'언니, 그러면 부모님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안 돼?'
쿵-.
집을 옮기느라 돈이 필요한 나에게 하는 룸메이트의 순수한 질문에 내 마음은 이내 바닥 깊은 어딘가로 내던져졌다. 혼자 아등바등하는 내 모습이 너에게는 조금 미련해 보였을 수 있겠구나.
너에게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선택지구나.
쉬운 선택지를 갖지 못한 나는 이내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어른이니까. 내가 내 생활을 책임져야 하니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너에게 이해받기 위해 계속 미련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련했다.
나에게는 항상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딸의 기억'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렸고, 공감했고, 위로를 받았다.
가난과 가족.
내 인생을 설명할 때도 절대 빠질 수 없는 단어들이다.
작가는 대학에 오면서 가난을 실감했다고 했지만 나는 나의 가난을 어릴 때부터 뼈저리게 느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중학교 입학식이다.
모두가 새 교복을 입고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가는 날. 나는 그날 혼자 사복을 입고 있었다.
부모님은 주변에 곧 전학을 갈지도 몰라 교복을 사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알았다.
우리 집은 나에게 교복을 사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2주 정도 흘렀을 때 엄마 손을 잡고 시내에서 가장 싼 교복집에서 교복을 맞췄다.
몸에 맞지 않아 굉장히 큰 교복 재킷이었지만 교복을 입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내 교복을 맞추느라 오빠의 급식 통지서는 계속 쌓여갔다는 것이다.
내가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게 되어 안심했을 때, 오빠는 학교에서 어떤 변명을 해야 했을까?
오빠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며 엄마와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
.
.
P.32
괜찮다는 음절의 사이에는 나의 안부보다 너의 안위에 대한 바람이 들어 있음을 이제는 안다.
나는 이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만은 괜찮을 예정이다.
엄마가 언제, 어느 순간에든 내게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그다지 큰 무게를 담지 않고라도 좋으니, 지나가는 말로라도 ‘괜찮냐’고.
이제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정말로 나는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니 엄마는 아무 생각 말고, 몸이나 신경 쓰라고.
.
.
.
엄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술에 취한 엄마가 나를 껴안으며 미안하다고 되뇌고 되뇌었던 날이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어을 때 엄마는 사업에 실패하셨고, 밖에서 술을 먹고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으셨다.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우셨고, 매일 우리의 하루는 가난하고, 분노하고, 슬픈 사람들의 이야기로 끝이 났다.
그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엄마의 귀가가 늦어질수록 아빠의 분노는 커져갔고 내 마음이 불안함에 물들어 까맣게 변했을 즈음에 나는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엄마를 마중 나갔다. 항상 나의 발길을 재촉하게 했던 가난한 동네의 어두운 밤길보다 불안함과 분노, 두려움이 가득한 검은색 방 한 칸이 나는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길에 한참 서서 멍하니 울고 있을 때 엄마가 돌아오셨다.
엄마를 부르며 뛰어가 안기는 어린 나를 안아주며 엄마는 미안하다고 끊임없이 되뇌이셨다.
그 뒤로 나에게는 작은 바람이 하나 생겼다. 적어도 이 여리고 안타까운 사람의 내일이 오늘보다는 따듯하기를. 내일은 오늘만큼 아프지 않기를.
그렇게 나는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는 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
.
.
P.110
엄마는 언제부터 엄마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삶에서 엄마를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시간이 찾아오기는 했을까.
.
.
.
내 삶에서 한 번.
엄마가 엄마를 그만하고 싶다고 했던 적이 있다.
그즈음 나는 속으로 부모님이 헤어지고, 엄마가 조금 더 행복했으면 바랐다.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살면서 가족과 멀리 떨어진 삶의 달콤함을 맛본 뒤라 가족만 없다면 엄마가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가 집을 나가고 싶다고 짐을 싸실 때 짐 싸는 것을 도우며 마음속으로 후련함을 느꼈다.
엄마의 행복을 비는 딸의 모습을 가장하면서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의 부재에 분노한 아빠와 불안해하는 동생으로 매일 두려운 밤을 보내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엄마를 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이기적인 나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엄마가 어디서 잠을 잤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나간 집을 왜 다시 돌아왔는지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때의 일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절절한 서러움을 느꼈다.
해결되지 않은 내 감정의 파편들 때문일까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들이 더욱 슬펐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로 절제된 감정들이 마음 깊숙이 숨겨놓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저자의 ‘나를 살리고, 엄마를 살리고, 혹시라도 글을 읽고 눈물 흘렸을 당신을 살리고, 가능하면 모두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말이 밤새 나를 울렸다.
다 크고 나서야 ‘어제의 슬펐던 내가 있어서 오늘 행복한 내가 있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서로의 하찮은 작은 몸짓이 애달프고 안타까워 울었던 가족들이 있어서 지금 애틋한 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바라본다.
이기적인 나이지만
그래도 내가 있음으로 우리의 내일이 오늘보다는 따듯하기를.
내일은 오늘만큼 아프지 않기를.
오늘은 밤에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책 소개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3916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