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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버무비 Aug 17. 2021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 이 리뷰에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벽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SF 영화들이나 게임들이 ‘유토피아’를 표방하는 사회를 소재로 활용한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벽한 사회를 뜻한다. 그러나 그런 사회가 실제로도 완전무결하다고 결론 나는 미디어 매체는 손에 꼽는다. 게임 ‘바이오쇼크’ 시리즈의 해저도시 랩처, 드라마 ‘굿 플레이스’, 영화 ‘데몰리션 맨’ 심지어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3’의 탁아소까지... 그래서인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유토피아’를 해석해보면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본래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렇게 표면상으로는 모든 게 완벽해 보이지만, 항상 흠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이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도 적용되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때 역시 마찬가지다.


 미셸 공드리 감독이 ‘휴먼 네이처’로 이미 호흡을 맞춰본 바 있던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과 함께 완성한 로맨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다. 조엘은 전 애인 클레멘타인이 ‘라쿠나’ 회사에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 이에 화가 난 그 역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하고 ‘라쿠나’를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요약된 스토리를 읽어봐도 알겠지만 찰리 카우프만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의 각본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와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두 작품 모두 관객들에게 한 인물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시켜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비현실적인 설정을 아무렇지 않게 중심 소재로 끌어들이는 점 역시 흡사하다. 하지만 ‘존 말코비치 되기’는 갈수록 끔찍한 설정들이 드러나면서 ‘겟 아웃’까지 생각나는 반면, ‘이터널 선샤인’은 인간관계와 사랑 그리고 기억에 집중한다. 



 초반 15분은, 우연히 몬 토크에서 만남을 가진 남녀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서사를 따라간다.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은근히 꽁냥대는 모습은 꽤나 낭만적이다. 이때 나오는, 금이 가 있는 얼음 위에 같이 누워 별자리를 관찰하는 장면이 이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사람이 난데없이 조엘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더니, 페이드 아웃 이후 갑자기 조엘이 차 안에서 질질 짜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 우린 ‘이터널 선샤인’이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터널 선샤인’은 로맨스 영화치고 상당히 독특한 비선형적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조엘이 기억 제거 시술을 받으면서 ‘라쿠나’라는 회사를 알았을 때부터 클레멘타인을 처음 만날 때까지 역순으로 기억이 회상되는 구조 하나가 있다. 두 번째로 그가 시술을 받는 순간부터 조엘의 집에 방문한 ‘라쿠나’ 원장과 조수들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 기억 제거 시술 이후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로 두 파트로 나뉘어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상당히 복잡하다. 기억이 제거되어 리셋됐으니 사실상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가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이 서사를 나누는 분기점이자 작품의 핵심 소재는 기억 제거 시술이다. 흥미로운 점은 획기적으로 좋아 보이는 이 시술이 정작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누구나 후회하는 순간이 있고 다시 시간을 돌려 또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데 말이다. 이 사람을 왜 좋아하게 된 건지, 카톡을 왜 그 따위로 보낸 건지, 혹시나 내 행동이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닐지. 기억 제거 시술은 인물에 대한 가장 최근의 기억들부터 사라지는 것으로 진행된다. 하워드 박사의 말에서부터 부정적인 면을 유추해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뇌가 손상될 수 있냐는 조엘의 질문에 박사는 이 과정 자체가 뇌 손상이라고 답한다. 최신 기억부터 서서히 사라지는 뇌 손상과 관련된 질병을 생각하면, ‘치매’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누구도 치매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엘이 종종 일기장을 쓰는 설정도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기억 자체가 우리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일기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찢기기도 하지만 언제든 꺼내 읽어볼 수 있는 일기장이다. 물론 모든 페이지에 완벽한 내용이 담기진 않는다. 조엘만 하더라도 나중에 클레멘타인이 무식하고 머리를 자주 염색하는 게 한심해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불속에서 그녀가 그에게 본인의 개인사를 공유하는 순간의 기억마저 제거되려고 하자 조엘은 변심한다. 더 이상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이 기억은 오직 둘이서만 나눌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혹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어버린 자신의 죄를 늦게나마 깨달았던 걸지도 모른다. 혹시 모른다. 클레멘타인도 조엘처럼 시술을 하고 있을 당시 머릿속에서 그과의 애틋한 기억을 보고, 제거를 멈추고 싶다면서 소리치며 나름의 저항을 하면서 후회했을지.


 이후 조엘은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나름의 투쟁을 벌인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클레멘타인에게도 직접 밝히지 않았던 어린 시절 기억들 속에 함께 숨는다. 사람이란 서로의 것을 공유하면서 친밀도를 쌓는 것이라며 클레멘타인에게 면박까지 받던 그였지만, 내내 잊고 싶던 그녀를 잊지 않기 위해 숨겨 왔던 과거 모습들을 그녀에게 공개하는 행보는 눈여겨볼 만하다. 통하는 듯싶던 방법이 통하지 않자 더욱 숨기고 싶었던 본인의 치부와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머릿속에서 그녀와의 친밀도를 쌓고 마음의 문을 열면서 조엘은 더욱 변화한다. 이는 곧 작품이 강조하는 테마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사실 확답하기 꽤나 힘든 질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터널 선샤인’을 만드는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 콤비는 이미 답을 정한 것처럼 보인다.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며, 티끌 없는 마음에 드는 영원한 햇빛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 구절은 작중 후반부 메리가 언급했듯이 알렉산더 포프의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라는 시에서 따왔다. 중세 시절 30대 후반 스승 엘로이즈와 10대 후반 제자 아벨라르는 서로 육체적으로 격렬한 사랑을 했었다. 그러나, 아벨라르의 삼촌에게 곧 발각되고 그녀가 임신하는 등 갖은 고생 끝에 서로 헤어지게 된다. 거세까지 당한 끝에 엘로이즈는 수도승이 되었고 아벨라르는 수녀원장이 되었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나무랄 데 없는 수녀의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세상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잊히니.

티끌 없는 마음에 드는 영원한 햇빛이라니!

모든 기도가 이뤄지고, 모든 소망은 사라질 지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되는 수녀는 어떠한 세속적인 행위를 하지 못 한다. 엘로이즈와의 사랑은 행복했지만,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럼에도 아벨라르는 죽을 때까지 엘로이즈와의 인연만큼은 이어 나간다.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언제나 슬픔과 고통 역시 그 과정에서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 리 없는 수녀들을 향한 구절이다. 메리와 하워드 박사의 관계 및 나이 차까지 생각해보면 확실히 시가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더 나아가 영화 제목 및 테마까지 연결시켜보자. 그동안 사랑했던 애인과의 추억과 경험들을 모두 싸그리 지워버리고 순수하게 살아갈 것인지, 갈등과 차이점에서 오는 고통과 설움을 안고서라도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랑과 추억을 쌓아갈 것인지 선택지를 남기는 셈이다. 결국 주인공들은 ‘영원한 햇빛’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게 더 쉬워 보일지라도 말이다. 후자에 ‘Okay’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주요 서사와 멀어져 보였던 ‘라쿠나’ 회사 직원들 역시 꽤 중요한 위치에 있다. 먼저 라틴어에서 유래한 ‘라쿠나’라는 단어부터 지식의 결함 혹은 누락된 조각을 의미한다. ‘라쿠나’의 기억 제거 기계도 은근히 하자가 많다. 시술 중에 잠깐 잠이 깰 수도 있고, 미약하게나마 무의식 속에 기억의 파편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완벽하게 시술을 해낸다고 보긴 어렵다. 대표적으로 기억 제거 시술 이후 조엘이 몬토크 바다 근처 집을 창문으로 확인해보고 떠나는 순간 클레멘타인과의 첫 만남 때 나눴던 대화가 환청처럼 작게 들린다. 참 신기하다. 웬만한 기억을 지웠음에도 마치 자석처럼 운명적으로 이전에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사랑의 본질이란 무엇일지 생각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몬토크라는 장소는 뉴욕 부근 여름 휴양지로 웬만하면 겨울에는 가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경험과 습관들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갔기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운명처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 첫 만남 때 입었던 의상과 거의 비슷한 옷차림으로 말이다. 특히 이 날은 밸런타인데이라서 더욱 낭만성을 극대화시킨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함은 단순히 기억으로 저장되고 끝나는, 결론적 감정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둘만의 진심이 담긴 기억을 축적하고, 각자의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같이 습관을 만들고 감정을 꿈꾸며 흔적을 남기는, 과정적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서로의 결점들을 인정해주고 보완해주면서, ‘완벽’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 함께 ‘완전’ 해지는 과정 자체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애 기록까지 치트 키로 갖고 있던 패트릭이 왜 이번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클레멘타인 특유의 변덕일 수도, 조엘처럼 과거에 대한 기시감일 수도 있다. 조엘의 “지금 죽어도 좋아. 나 너무 행복해. 이런 기분 처음이야” 말을 편지에다가 썼을 정도면 그만큼 과거에 감동을 받아 뇌리에 박혔다는 얘기인데, 그걸 거의 그대로 말했으니. 하지만 더 나아가 심리적으로 접근해보면, ‘불쾌한 골짜기 현상’을 연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는 ‘인간이란 인간을 닮지 않은 대상보다 인간을 어설프게 닮은 대상에 더욱 불쾌함과 혐오감을 느낀다’는 현상을 일컫는다. 패트릭은 조엘이 예전에 했던 말들을 따라 해 보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 유대감을 형성하기보다는 그냥 취향에 딱딱 맞춰 말과 행동을 하는 패트릭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서서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기계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딱히 스토리도 없는 듯했던 하워드 박사와 스탠이 메리 스베보의 기억을 이미 한 번 지웠던 적이 있다는 것도 후반부에 밝혀진다. 특히 자신의 테이프를 들으면서 기억을 되살려보려는 메리의 행동은 이미 이름에서부터 암시된다. 이탈리아의 작가 이탈로 스베보에게서 그 이름을 따온 것처럼 보이는데, 주인공이 정신과 의사에 의해 자서전을 쓰면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스토리의 ‘제노의 의식’이 그의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일이 실제로는 ‘라쿠나’ 사람들이 과거에 이미 겪었던 일이라는 게 꽤 흥미롭다. 이는 곧 슬픈 기억이 있다고 모든 기억을 다 지워버리는 일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주제 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차피 감정과 무의식적인 습관이 남아서 어떤 식으로든 운명적으로 마주치게 될 거라고 냉소하는 영화다.


 ‘이미 결별했던 커플이 서로의 기억을 잃고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어찌 보면 낯 부끄러운 시놉시스를 이렇게 선명하게 납득시키고 애틋함과 처연함까지 느껴지는 성과엔 미셸 공드리의 연출력이 단연 큰 역할을 했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의 수작업과 최소한의 CG 작업으로 표현한 연출은 상당히 효과적이면서도 많은 영감을 준다. 더불어 앞서 말한 연애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갈등과 부정적 감정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주인공들을 더욱 대비시키는 연출 디테일들도 눈에 띈다.


 특히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많은 점에서 서로 상극인 것이 드러난다. 일단 조엘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쉽게 말해 아싸다. 일기장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사색적이며, 전체적으로 구심력이 작용하는 편이다. 패션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쪽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적으로 파란색이나 청록색이 옷에 많이 있다. 정반대로 클레멘타인은 즉흥적이고 외향적이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능숙하게 말을 걸며 대화하는 등 인싸다. 즉 원심력이 작용하는 편이다. 옷과 관련해 귤색 후드티를 대표적으로 입으며, 자기 맘대로 머리를 염색한다.



 클레멘타인의 머리 색깔이나 옷을 특히 주목해볼 만하다. 조엘과 처음 만날 당시에는 초록색, 정식 첫 데이트 때부터 가장 열정적인 사랑을 할 때까지는 빨간색, 서로에게 슬슬 무관심해지며 갈등이 커져가다 헤어질 때까지는 주황색, 결별 이후부터는 파란색이다. 참 다채롭다. 초록색은 대체로 생명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새 출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고, 빨간색은 말 그대로 막 끓어오르는 열정, 주황색 역시 사랑을 상징하지만 빨간색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편은 아니다. 또는 사랑은 해도 서로에게 지겨워진 시기를 대표한다. 마지막 파란색은 ‘Blue’라는 형용사에서도 연상되듯이 우울함과 차가움을 상징한다. 다른 의미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의미를 내포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조엘 같은 경우에는 청록색 계열의 옷을 자주 입고, 방 분위기는 파란색의 소품들 덕분에 파랗다. 재밌게도 청록색 및 파란색은 각각 빨간색 및 주황색과 보색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시각적인 측면에서도 인물들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타인이 머리 색깔과 보색 관계인 파란색 계열의 옷을 입는 장면도 은근히 많아 이 이야기가 갸우뚱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은 개인사까지 풀어놓으며 조엘과의 교감을 원했고 그의 결점까지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조엘은 기억 제거 시술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서 누군가와 교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갈등이 없는 완벽한 교제를 바란다면, 그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았기에 수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욕망들이 타인의 욕망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갈등이 생긴다는 것은 의견이 충돌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그렇게 됨으로써 속상함과 다툼은 연애에 있어서 필연적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이 다툼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결별하고 마는 엔딩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극복해 낸다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 위를 걷다가 마침내 손을 잡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데에 성공한 셈이다. 완벽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완벽하지 않은 존재들이 모여 서로를 채워가며 완전해질 수는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지고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된 커플의 기적적인 이야기로만 한 줄로 단순하게 요약되기에는 많은 텍스트들을 담고 있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이 사실 얼마나 소중한지, 슬픔이 없어도 행복이 있을 수 있는지 등 오늘 나왔던 이야기들 말고도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프로이트와 인간 심리를 통해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고, 뛰어난 편집으로 어떻게 다중의 스토리를 매끄럽게 전달할 수 있는지 얘기할 수도 있다. 근데 인간 심리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고, 컷 바이 컷을 하기에는 영화 지식도 덜 익혀서 서둘러 이 정도 선에서만 마무리하고자 한다. 한 번 볼 때보다 두 번 볼 때 더 많은 디테일들을 찾을 수 있다. 케이트 윈슬렛과 짐 캐리의 정극 연기는 언제나 감탄스럽다. 8/10


희망 없는 두려움은 없고, 두려움 없는 희망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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