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사랑한 남자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
처가가 시카고에 있는 터라 명절이면 가족들이 모이고, 간만에 모여서 늘 하는 얘기들도 매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얼마 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나오기 전으로 기억하는데, 모임에서 자연스레 종교 이야기가 나왔고 지독한 무신론자인 나는 신앙이 철저한 처갓집 식구들과 종종 그랬듯이 다소 유치한 종교 논쟁(화기애애한 분위기로)을 벌이던 와중에 동성애에 대한 얘기가 나왔더랬다. 나는 20대인 조카한테 만에 하나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인간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분명 그 신은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죄악시하는 교인들은 모두 지옥에 보내거나 멀리하고서 프레디 머큐리를 옆에 두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다소 비논리적 주장을 들은 조카의 대답. "프레디 머큐리가 누구예요?"
내가 퀸을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마이클 잭슨 신드롬으로 팝송을 처음 접한 나에게 라디오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밴드 음악들의 신세계를 접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통로였고 나는 종종 내 방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새로운 밴드들과 그들의 음악을 하나씩 접수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것이 취미가 되기 시작할 무렵, 한 방송에서 퀸의 앨범 중 가장 저평가되었던 앨범 핫 스페이스에 수록된 곡들이 흘러나왔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존 디콘의 감각적인 베이스와 프레디 머큐리의 신이 내린듯한 완벽한 목소리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보컬 그리고 거기에 입혀진 브라이언 메이의 생전 처음 듣는 음색의 기타 연주. 사실 초등학생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곡들이긴 했지만, 이런 음악도 존재하는구나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내 앞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에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후에 그때까지 나왔던 퀸의 모든 앨범, 그리고 하드록과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그리고 학창 시절 록밴드 기타까지 나의 어린 시절을 관통한 이 음악들의 시작은 다름 아닌 퀸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였다.
그런데 왜일까? 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나왔을 때 난 왠지 이 영화가 보고 싶지 않았다. 주연배우 레미 말렉의 과도한 듯한 앞니 분장? 도 맘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한테는 음악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이 네 명을 배우들이 흉내 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관심은 이내 온라인상의 리뷰를 좀 읽고 사람들의 반응을 체크하는 정도로 전락했고 이내 영화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에 사는 형과 카톡을 하다가 우연히 영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신은 이 영화를 두 번 봤다고 하면서 나도 보았는지 물어본다. 바이올리니스트인 형은 어린 시절 퀸을 무척 좋아하고 많이 들었지만 평소 대중문화 특히 영화에는 큰 관심이 없는터라 나에게는 이런 사람이 이 영화를 그것도 두 번 씩이나 보았다는 건, 내가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보헤미안 랩소디의 누적 관객수는 980만을 넘고 있다. 정말 엄청난 인기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나한테 프레디 머큐리가 누구예요?라고 물어본 조카도 분명 여자 친구와 영화를 봤을 것이다. 왜 이 영화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 걸까?
영화 평론은 때로는 나한테 영화를 감상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어떤 평론에 동의하든 안하든 전문가의 시선이나 예리한 분석은 내가 영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왔다. 그래서 좋은 방법이 아닌 줄 알면서 영화를 보기 전에 한 두 개의 평론을 읽기도 한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평론 중 가장 혹평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타임스 A.O. Scott의 리뷰를 보면 (다행히도 영화를 보기 전에 난 이 리뷰를 읽지 않았다.) 제목부터가 처참하다. 퀸의 대표곡 중 하나인 Another one bites the dust. 를 말 그대로 인용해서 이 영화가 또 하나의 졸작임을 암시하고 있다. 전체 리뷰에서 좋은 평가는 찾아볼 수 없고, 그의 평론 중 눈에 띄는 몇 가지를 인용하자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전체적인 서술의 건축(narrative architecture) 은 레고로 만든 클리셰의 궁전이다.", "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이라는 밴드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상기시켜줄지 모르지만, 이 밴드에 대한 가식적이고 의심스러운 감각을 전해줄 뿐이다." 그러고 나서 이 평론은 이 영화를 보느니 유튜브나 레코드판을 꺼내 듣는 것이 아마도 더 나을 것이라는 조소로 평을 마친다. 사실 이러한 시각이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싫었던 이유였고, 이 영화에서 감독이나 제작자나 이러한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한계(이미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기억 조차 생생하며 또는 영상이나 음악을 쉽게 찾아서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를 뛰어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나의 감정은 두 가지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 하나는 프레디 머큐리와 퀸의 모습을 가능한 진솔하게 투영하려는 감독의 의도에 대한 공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퀸은 사실적이지만 결국에는 단순한 모방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에 의한 허무함. 이 영화의 가장 큰 태생적 한계는 이 후자를 극복할 수 있는 감독이나 배우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우리나라 관객들이 전자, 그러니까 이 영화를 관객과 퀸을 연결시켜주는 통로로서의 역할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한 이유로든 훨씬 수월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아닌 퀸 자체에 열광하고 감동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정말 기이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러한 현상을 폄하하기엔 영화에서 드러나는 브라이언 메이의 의도나 감독과 래미 말렉을 비롯한 연기자들의 퀸을 비추는 투명한 영화에 대한 진정성이 너무나 뚜렷하다. 결국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도 머리가 아닌 마음을 열고 영화 속의 퀸을 보기 시작했다면 그의 논리적이고 이유 있는 비판도 순식간에 휘발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평론가의 역할일 수 있는가는 논외로 했을 때 말이다.
인간 프레디 머큐리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데 난 왠지 브람스는 싫어라고 할 수 없듯이, 록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퀸, 그리고 싱어로서 그리고 퍼포머로서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프레디 머큐리는 신이 내린 선물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91년 11월 24일 에이즈에 의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팬들이 내뱉은 말은 "신이 그를 너무 사랑해서 빨리 데려간 거야" 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프레디 머큐리 그는 신이 사랑한 남자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