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막내 하나가 서점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260쪽짜리 책 한 권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책이 못 읽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서점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서점 주인은 막내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책을 뒤적여 보고 "좋소."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책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서점을 찾아 들어갔다. 품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 그 책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읽을 수 있는 책이 오니까?"하고 묻는다.
서점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이 책을 어디서 베꼈어?"하고 묻는다.
막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누가 써줬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허튼짓을 해줍니까? 써주면 돈은 안 받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막내는 손을 내밀었다. 서점 사람은 웃으면서 "좋소."하고 던져 주었다. 책 한 권을 지니고 쓸모를 확인하는 막내.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책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는 것이다. 거친 손바닥이 누더기 위로 그 책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책을 손바닥에 들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써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고발하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베낀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누가 써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책을 써줍니까? 단문 하나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콘셉 하나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하루하루 쳐댄 드립으로 몇 개씩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드립 마흔여덟 개를 잡담 한 편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대양 한 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책을 썼단 말이오? 그 책으로 무엇을 하려오?" 하고 물었다.
20여 년을 익명의 그늘에 숨어 키보드 워리어로 살았는데, 별생각 없이 던져놓고 혼자 실실 쪼개곤했던 드립이 어느새 깨알같이 모여들어 책 한 권이 되고 말았다. 벌써 9년째, 이 바닥 늙은 막내로 살다 보니 이렇게 뜻하지 않은 일도 생긴다.
막상 책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쩐지 '작가' 소리는 영 듣기 민망하고 나는 여전히 이 바닥 많고 많은 변호사 중 지극히 하찮은 1인이다. 훅 불면 단숨에 성층권까지 날아갈 먼지보다 미약한 존재감에도 변함이 없지. 과연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많은 분들의 노고와 도움으로 일이 커져버렸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누차 강조한 것처럼, 이 책은 누구 인생에 도움되라고 쓴 게 아니라서 숙독, 통독, 탐닉해봤자 뻔한 일상은 전혀 개선되지 않을 거다. 내 인생도 지금 해결이 잘 안 돼서 죽을 둥 살 둥 골치가 아픈데 내가 무슨 남의 인생에 헬프를 다니고 버프를 띄워주고 지적질, 조언질이야...
다만, 이 책은 이 바닥 투덜이가 쌓인 유감을 토로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쩐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정신승리의 연대'를 추구한다. 빡쎄고 뻔하고 부질없는 하루를 보낸 뒤 '내일은 좀 다를 거야'라며 되지도 않는 희망을 품어봤자 영락없이 똑같은 하루가 또 찾아온다. 그놈의 일상은 이제 그만 좀 오시라 해도 들어먹질 않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렇게 인생에 겐세이가 마니 껴있는 건 오직 나뿐인가 싶다.
바로 그때, 그저 그런 보통 직딩이 슬며시 옆자리에 끼어 앉아 같은 푸념과 한숨을 늘어놓는다면, 말 한마디 섞지 않더라도, 오늘 처음 보고 내일부터 죽을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지라도, 어쩐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정신승리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p.s. 지하철이나 카페 같은 데서 우아하게 펼쳐 들고 읽을 수 없는 책이라면 미안. 하지만 저 쾌변이 그 쾌변은 아니니깐 그렇게 민망해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