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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저녁 Oct 13. 2020

저도 귀한 손님이고 싶거든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난해한 경험


결혼은, 내가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집 식구가 되는 인생 최초의 경험이다. 제아무리 집에서 똑똑하고 착한 자식이라 한들 결혼하는 순간 남의 집 귀한 자식의 배우자일 뿐이다. 나는 결혼이 힘든 건 모두 이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부부 당사자들끼리의 문제야 지지고 볶으면 어떻게든 수가 생긴다. 하지만 여기에 가족이 끼어들면 골치 아파진다. 명절날 부부들이 싸우는 것도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내가 우리 집 귀한 딸이 아닌, 기자님이 아닌, 며느리가 되는 일. 결혼생활 중 가장 어렵고 여전히 낯선 게 바로 이 지점이다. 결혼한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비슷한 고민, 비슷한 마음들이다.


다행히도 나는 좋으신 시부모님을 만났다. 시부모님은 혹여라도 내가 부담을 느낄까, 깊고 조용히 마음 써주신다. 게다가 남편이 장손임에도 난 제사상 걱정이 없으니 복 받았지. 아버님께서 제사가 다 무슨 소용이냐며, 살아 있는 동안 서로 자주 보는 게 의미 있다며 ‘제사 보이콧’을 선언하셨기 때문이다(얼마 전 제사용품을 모두 내다 버리셨다).


9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그만둔 나를 남편이 백수라 놀리자 ‘수정이가 오래 고생하고 그만뒀으니 곁에서 더욱 신경 써주고 마음 써줘야 한다. 부부라도 말 한마디도 조심히 해야 한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남편에게 보내신 분이 바로 우리 시어머니시다. 시아버님께서도 내가 없는 자리에서 “부부 사이에 돈 벌어 오라는 이야기는 절대 해선 안 된다”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하셨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떤 유부남 선배는 “네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구나”라며 손뼉 쳤다. 감사한 일이다.


고로, 나는 시월드 걱정 없는 지구상 최고로 행복한 며느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첫 명절을 맞이하고 이 들뜬 꿈이 산산조각 났다.     


첫 명절이었다. 식을 치르기 전부터 함께 살았으니, 정확히는 첫 명절은 아니었다. 여하튼 추석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성묘에 다녀온 뒤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시댁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집을 나서려는 내게 아빠가 “명절인데 이제 우리 딸내미가 집에 없네”라며 웃었다. 아빠는 외로운 마음을 애써 미소로 감췄다. 난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고 나서야 겨우 친정집을 나설 수 있었다. 결혼하고 눈물이 많아졌다.


시댁에는 시부모님과 시가 어르신들이 조촐하게 모여 계셨다. 저녁을 먹고 후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내 목소리는 허공 속에 흩날리며 사라졌다. 시동생의 여자친구 부모님 근황은 물어보셔도 우리 부모님 근황은 물어보시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아니, 너무 속이 상했다. 당장 현관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 “명절인데 이제 우리 딸내미가 집에 없네”라는 아빠의 말이 자꾸만 떠올라 화가 났다. 내가 왜 엄마 아빠랑 밥도 못 먹고 명절날 이런 미묘한 냉기를 느껴야 하나. 돌아가신 친정집 어르신들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친척들과 북적북적 음식 한 상 차려 놓고 웃고 떠들던 시절이 그리웠다.


눈치 없는 남편조차 분위기가 이상한 걸 감지했는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시가 어르신 중 한 분이 우리가 살림을 합치고 인사드리러 오지 않아 서운해하셨다고 말이다. 남편아,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내면 어떡하니. 우리 실수였다. 결혼 준비와 회사 일로 바쁘더라도 인사를 드렸어야 했다. 친정 어르신들에게는 인사 못 드렸어도 신혼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사시는 시가 어르신들께는 인사드리는 게 맞았다. 


시아버님이 아무리 허례허식을 따지지 않는 분이라 하셔도 모든 어르신이 같은 생각이신 건 아닐 테니까.

이 일을 겪기 전까지 나는 시월드에는 시부모님만 포함된 줄 알았다. 무지몽매했지. 시월드에는 시부모님을 포함, 시가 일가친척, 팔촌까지 다 포함된 것이라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리고 그 시월드 안에서도 나름의 정치와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도.


결혼하고 늘 물음표로 남는 것은 왜 시월드라는 말은 있는데 처월드라는 말은 없냐는 거다. 어째서 남편은 내가 하는 고민으로부터 자유롭냔 말이다. 사위는 철 좀 없어도 되는데 왜 며느리에겐 그런 아량이 용납되지 않는 걸까. 사위는 집안 기둥인 양 큰 목소리를 내도 되는데 왜 며느리가 그러면 드센 여자가 되고 마는 걸까. 사위는 언제고 환영받고 존중받는 백년손님인데 왜 며느리는 고운 얼굴로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 존재인 걸까. 심지어 백년손님의 사전적 의미도 기가 찬다.     


• 백년손님: 평생을 두고 늘 어려운 손님으로 맞이한다는 뜻으로, ‘사위’를 이르는 말

― 『표준국어대사전』     


왜 사위만 어렵고 귀한 손님인가. 며느리도 대접받는 귀한 존재일 순 없는 걸까.     


“구 씨 집안에 안경 낀 사람이 없는데 우리 아가 눈이 왜 나쁠까.”


남편의 할머니, 그러니까 시어머니의 시어머니께서 하신 이 말씀을 어머님은 꽤 자주 꺼내신다. 남편은 그때마다 껄껄 웃으며 듣지만 난 어머님께서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리시는 이유를 안다. 상처가 된 말이기 때문이다. 어머님께서는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두고두고 상처받고 서운한 게 며느리의 마음이라 하셨다. 당신도 며느리이니 그 마음을 잘 안다고 하셨다.


현실에 주저앉아 미소만 짓는 며느리가 되고 싶진 않다. 지혜롭게 며느리의 역할을 하면서도 부당한 일에는 목소리 내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며느리는 서운함을 느끼는 존재로만 남을 테니까.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만 있긴 싫으니까. 냉랭한 공기에 눈치만 보고 있긴 싫으니까. 애초에 상처 주는 말을,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될 일이니까. 며느리도 사위처럼 백년손님이 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훗날 딸을 낳고, 그 아이가 결혼하게 된다면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에 맞춤화된 며느리가 되지 않길 바란다. 예쁨 좀 덜 받더라도 제 목소리를 당당히 냈으면 한다. 내게 며느리가 생긴다 해도 마찬가지다. 며느리를 백년손님, 천년손님처럼 귀하고 정답게 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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