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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Nov 19. 2023

우정에 관하여(1)

- 기욤 카네의 <프렌즈, 하얀 거짓말>

  Image of Cap Ferret by VARIMAGE from Pixabay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욤 카네의 <프렌즈, 하얀 거짓말>(2010)과 <보르도 우정 여행>(2019)     


20세기에서 벗어나, 21세기의 영화를 다루고 싶어서 웹을 뒤지다가 발견한 두 편이 있다. 기욤 카네(원어에 가까운 발음은 ‘꺄네’가 맞지만, 나는 동의한 적 없는 외국어 표기법에 따르려면, ‘카네’로 써야 한다. ‘꺈’ 영화제를 ‘칸’ 영화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는 배우로 출발하여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으로 행보를 넓힌 프랑스의 중견 감독이다. 2007년에 그가 마리옹 코티아르의 동반자가 된 일은, 할리우드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의 만남에 비견되는, 프랑스 연예가의 빅뉴스였다.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식 타이틀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 <프렌즈, 하얀 거짓말>의 원제목은 <작은 손수건(Les petits mouchoirs)>이다. '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손수건을 놓다 (le mettre dans sa poche et mettre un mouchoir dessus)'라는 관용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숨기는 행위를 그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2010년에 개봉 당시 오백오십만 관객을 유치하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그해 파리에 있었는데도 내 기억이 희미한 것은, 그때 너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영화를 챙겨 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보기는 했으나 크게 인상적이지 않은 영화였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었으나 호불호는 조금 나뉘는 작품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출연진이 화려하다는 것, 단점은 스토리가 조금 늘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러닝 타임이 긴 것을 꼽을 수 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사실, 그 속편 격인 <보르도 우정 여행>이 먼저였다. 이 작품 역시 화려한 출연진이 눈에 들어왔고, 제목을 보니, 추억 속에 남아있는 보르도 인근 대서양의 해변도 다시 보고 싶었다. 보르도를 생각하니 몽테뉴도 생각났다. 그리고 그의 《수상록》에 수록되었던 우정에 관한 이야기도. 보르도와 우정이라고 하니 몽테뉴가 생각났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이런 연상작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언젠가 프랑스의 중서부 지방을 여행할 때 보르도를 거쳐 차로 한 시간 거리, 몽테뉴의 성이 있는 생 미셸 드 몽테뉴를 방문한 적이 있어서였다. 그로부터 일(Isle)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페리괴(Périgueux)까지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몽테뉴와 라보에시의 우정도 남달랐기에 더욱 그랬다.


(*요절한 천재 작가 라보에시, 그의 이름은 누군가 처음에 잘못된 발음으로 국내에 소개해서 라보에티로 알려져 있다. 가끔은 라부아티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라보에티는 아닌 것이 분명해서 N사의 백과사전팀에 정정 요청을 했다. 발음 문제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직업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어는 이상하게도 왜곡된 발음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어떻게든 바로 잡아 보려고 애를 써 본다.)     


“내가 말하는 우정 속에서는 그 영혼들이 서로 뒤섞여 합쳐지는데, 이 혼합은 매우 전폭적이어서 영혼들은 서로를 이어주던 이음새를 지워버려 더 이상 그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왜 그를 사랑했냐고 다그쳐 묻는다면 '그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였기 때문에'라는 대답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모든 담론, 특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이 결합을 중재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숙명적인 힘이 있다.”

  - 몽테뉴, 《수상록》     


평범한 사람들이 이 정도의 숙명적인 우정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듯한데, 이 두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우정은 이보다는 좀 더 현실에 가깝다. 그런데 디테일에 있어서는 한국적인 현실과는 약간 거리감이 있기도 하다.      

파리에서 호텔과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물질적인 성공을 거둔 막스(프랑수아 클뤼제)와 그의 아내 베로(발레리 본느통)는, 대서양에 면한 캅 페레(Cap Ferret)라는 지역의 별장으로 매년 친구들을 초대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루틴이다.      


캅 페레 반도(아르카숑 만을 둘러싼 기다란 지형)는 주로 가족 단위의 조용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는 고장이다. 휴가지로 명성이 높지만 '개발'의 독을 피해 여전히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연환경 덕택에 스크린에서도 고즈넉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장소라면 무조건 고층의 럭셔리 호텔을 지어대는 정서와는 확실히 구별이 된다.     


법정 휴가 일수가 평일로만 30일, 일요일을 포함하면 5주나 되는 프랑스에서도 사람마다 휴가를 보내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막스처럼 지방에 멋진 별장이 있어 친구들을 초대할 수도, 아니면 수영장이 딸린 멋진 집을 독채로 빌려 한 달을 머물면서 지인과 친구들을 초대하며 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돌아다니는 여행보다는 한 장소에 길게 머물며, 진정한 휴식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지인의 덕을 본 적이 있었는데, 내 쪽에서는 지인의 가족들을 식사에 몇 번이고 초대하는 것으로 신세를 갚기도 했다. 장을 봐서 직접 요리를 해 주기도 하고, 근처 마을의 맛집에 초대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휴가를 앞두고, 무리 중 하나인 뤼도(장 뒤자르댕)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큰 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일이 생긴다.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상한 그를 차례로 문병하지만 뤼도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모르핀 주사를 맞아 점점 의식이 흐려진다. 친구들은 의논 끝에 여느 때처럼 막스의 별장으로 여행을 강행하게 된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항공편으로 급히 돌아오면 된다고 마음을 달래며... 한때 뤼도의 여친이었던 마리(마리옹 코티아르)는  수많은 이성 또는 동성과의 만남을 즐기는, 자유롭지만 다소 방탕한 싱글인데, 갈수록 고통이 깊어지는 뤼도에게 별장에 도착한 뒤 전화를 건다.      


  말주변이 없으니 짧게 얘기할게. 중요한 얘기니까 매일 기억해 줘.

  너는 멋진 남자야. 세상에서 제일 멋져. 너 같은 사람은 드물어.

  오래전 일이고 서로에게 상처 많이 주고 끝났지만, 너와 함께여서 행복했어.

  그럼 이만... 고마워.      


뤼도는 엉망이 된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듣고만 있다가, 중상으로 윤곽이 허물어져 내린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살짝 웃었다. 죽기 전에 누군가로부터 이런 고백을 듣는다면 썩 나쁘지는 않은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다. 나르시시스트의 후버링이라면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은 배우 에릭(질 를루슈)은 휴가기간 동안 여친 레아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는다. 그 일로 괴로워하면서도 마리와, 지나가는 소녀들에게까지 틈틈이 들이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남자들은 언제나 있다. 허우대만 멀쩡한 앙투안(로랑 라피트)은 헤어진 전 여친 줄리에트 때문에 안절부절못한다. 그녀의 문자 한 통에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친구들을 돌아가며 귀찮게 하는 좀 덜 떨어진 인물이다. 에릭과는 고용 관계에 놓여 비서 노릇을 하는데, 비굴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치료사 뱅상(브누아 마지멜)은 난데없이 막스에게 연모의 감정을 고백한다. 자기는 동성애자가 아니지만 막스만 보면 마음이 설렌다고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막스는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 되고 다른 친구들이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진두지휘하고 싶어 하는 그는 매사에 무리를 해서 신경쇠약에 걸리기 일보 직전이 되고, 아내 베로는 인내심이 바닥나 분노를 터뜨린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굴 양식업자인 바다 사나이 장 루이만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시선으로 모두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캅 페레에 사는 장 루이는 매년 막스의 친구들을 맞이하는 입장이다. 그는 모두 서로 아끼는 척하면서 가식적인 친구들의 정곡을 찌른다. 매사에 돈으로 생색을 내며 친구들 위에 군림하려는 막스의 선물을 거절하고, 친구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휴가를 즐기는 친구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결국 뤼도는 세상을 떠나고, 모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하는데, 장 루이 혼자서 맨발에 평상복 차림으로, 뤼도의 추억이 담긴 바닷가의 모래를 퍼다가 무덤에 뿌려준다. 모두 장 루이를 얼싸안고 그의 행동에 감동의 눈물과 미소를 짓는다. 그들은 이렇게 화해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분위기가 속편에서도 계속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장 루이역을 맡은 조엘 뒤퓌슈는 직업 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이 지역 토박이로, 6대째 대를 이어온 굴양식업자이자 유명 식당을 경영하며, 보르도 상공회의소 부소장까지 역임한 지역 유지인데, 기욤 카네와는 오랜 친분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캅 페레를 상징하는 화신이 되었다는 뒷이야기다. 연기 실력도 상당해서 난 그가 배우인 줄로만 알았다. 캅 페레를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그가 운영하는 '황후의 양식장'에 들러 품질 좋다는 굴을 시식해 볼 만도 하다.      


<프렌즈, 하얀 거짓말>은 이렇게 뤼도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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