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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Mar 08. 2024

현실해부학 강의

<추락의 해부> by 쥐스틴 트리에

  (*글쓰기 시점에서 현재 상영 중인 작품이기에 스토리 공개는 최대한 절제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한 이야기가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한 부부를 둘러싼 것인데, 어느 쪽의 이야기가 ‘진실’이나 ‘사실’에 가까운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다. 어느 쪽이 현실을 왜곡하는가는 질문의 대답은 독자의 몫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이후, 그를 능가할 만한 ‘각자의 이야기’는 매우 드물거나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자신의 현실이 몇 번이고 타의에 의해 왜곡되는 경험을 하다 보면, 대체 현실이란 무엇인가 하는 형이상학적 내지는 양자물리학적 탐구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 스토리를 떠올리던 참에, 이 영화를 만났다.     


‘아나토미(해부)’라는 단어에서 단단히 긴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상영관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음성을 녹음하여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앱을 열어 보았으나 프랑스어가 지원되지 않아서 포기했다. 보다가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녹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단순 녹음을 해서 나중에 녹음 파일을 열어 다시 듣기를 할 열정은 없었다. 그래서 원시적으로 노트와 펜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암흑 속에서 노트하기. 가끔 상영관 안에서 그런 짓을 한다. 연출가들이 쓰는 작은 조명이 달린 ‘극장용 펜’이 있기는 한데, 옆사람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점점 쇠퇴하는 기억력을 지탱해 주는 것은 메모뿐이다. 뒤져 보면 어디선가 스크립트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 때도 있다.     


첫 장면. 계단이 정면에 마주 보이고 작은 공 하나가 계단을 통통통 치며 굴러 내려온다. 공의 추락. 곧 몸집 큰 개 한 마리가 쫓아 내려와 공을 입에 물고 다시 올라간다.     


산드라는 이름이 알려진 작가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인터뷰를 하러 집으로 방문했으나, 산드라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터뷰에 집중하지 않고 술을 한잔 하며 되려 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뭘 좋아해요? 관심 있는 게 뭐죠? 한데 질문의 뉘앙스는 상대를 유혹하는 듯 들린다. 학생은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답한다. 달리기요. 약에 취하는 것처럼 좋아요. 이층에서 들려오는 과하게 시끄러운 음악 소리는 이들을 불안하게 하고, 결국 인터뷰는 중단되어 학생은 떠난다. 고집스럽게 목청 높았던 산드라의 남편 사뮈엘이 틀어놓은 음악이었다. 집 밖으로 나간 학생의 뒤로 하얗게 눈 덮인 험산준봉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산드라의 집은 목조로 지은 산장 스타일의 샬레였다. 도시인 그르노블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다고 한 것으로 봐서 그르노블 인근인 듯하다. 알프스의 수도라는 별명이 붙은 이 도시는 산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분지여서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그들의 아들 다니엘. 어린 시절에 사고로 시각을 상실한 11세 소년은 자신의 안내견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한다. 일본의 피아니스트 츠지이 노부유키가 떠올랐다. (그래서 때마침 그의 콘서트가 열리는 예술의 전당까지 쫓아갔다. 정신과 육체의 놀라운 도약!) 어느 날 안내견과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다. 그때까지도 음악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추락사를 한 것으로 보이는 사뮈엘의 죽음을 놓고 부검을 통해 자살인지 타실인지 밝혀보려 하는데, 머리에 둔기로 내려친 상흔이 확인되자,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었기에 집안에 있던 산드라가 유력한 용의 선상에 오른다. 법정 공방을 통해 그들 부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눈과 귀를 곤두세운다.       

아름다운 그르노블의 모습을 더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완전히 무시당한 체,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사뮈엘의 추락을, 부부의 ‘현실’이 해부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완전한 해체는 아닌, 여기 저기에 구멍을 조금 뚫었을 뿐이다. 이쪽 구멍에서 저쪽 구멍이 언뜻 비치기도 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 지방층을 만나기도 한다. 다 보여주는 척하지만 우리는 그저 짐작할 뿐이다. 배경은 주로 사건이 일어났던 산속의 집, 그리고 법정 장면이 전부여서,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작가 아르튀르 아라리의 시나리오(감독과 공동 집필)와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카메라가 협업한, ‘현실 해부학’, 강의다.      


허구가 현실을 부술 수 있도록 지나간 흔적을 지우는 것이 나의 일이에요.      


이 문장은 극 중에 등장하는 괴물, 한 나르시시스트의 대사다.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식견이 없지 않은 나로서는 이 문장이 나르시시스트를 매우 적합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말미에 산드라가 무죄선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들 다니엘은 침대 위에서 졸린 얼굴로 말한다.


“나는 엄마가 돌아오는 것이 무서웠어요.”

“나도 집에 오는 게 무서웠어.”


 엄마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죽은 다니엘도, 법정에서 시달린 산드라도 아닌, 아들 다니엘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장애를 견디고, 부모의 불화를 견디고, 급기야는 깊은 고심 끝에, 엄마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법정에서 매우 중요한 증언을 해야 했던 다니엘의 이야기다.


그의 증언은 허구였을까? 아니면 진실이긴 하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겨진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진실의 지류였을까? 부서질 듯 연약하지만, 내면의 깊은 상처로 인해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고 결단력 있는 다니엘을 섬세하게 연기해 낸 소년 배우 밀로 마차도 그라네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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