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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May 12. 2021

알싸한 기억이 그리움을 두드릴때

  초가을 따뜻한 햇빛이 베란다 앞 나무 잎사귀에 하나씩 부딪히던 날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반짝거리는 빛이 나뭇잎을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빛은 베란다 나무 데크 위로 물결무늬를 내며 떨어졌다. 10개월 아기를 안은 채 신랑과 부엌에서 준비한 음식을 확인할 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엄마가 도착했다.



  그날은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 집에서 친정 식구가 모이는 날이었다. 현관문을 지나 거실로 들어오는 엄마를 보자 나는 얼굴에 불편함을 숨기지 못했다. 눈을 엄마 가방으로 돌리며 “왔어?”하고 말을 건넸다. 엄마도 내 얼굴을 보지 않고 허공을 두리번거리며 외투 놓을 곳을 찾았다. 엄마는 내내 무심한 표정을 짓다가 아기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아주 환하게 웃었다.


  “할미다~”


엄마가 손을 내밀며 아기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기는 무서운 듯 얼굴을 내 품에 파묻었다. 아쉽게 손을 거두는 엄마 얼굴에 서운함이 스쳤다.


  우리 아기는 그날 친정 엄마를 세 번째 보는 거였다. 아마 친정 엄마가 낯설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아기가 내 불편한 감정을 느꼈던걸 지도 모르겠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불현듯 마음이 저리기도 했다. ‘나도 우리 아기처럼 사랑받았을까’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 엄마는 내 일이라면 늘 매몰차게 거리를 두었다. 출산 후에도 엄마는 내가 겪는 일과는 먼 곳에 있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갓 태어난 아기와 지낼 곳이 없어 난감해했다. 이사 갈 집 리모델링 기간이 출산일과 겹쳤기 때문이었다. 시댁에서는 흔쾌히 도움을 주려했지만, 나는 쉽게 시댁으로 갈 수 없었다. 가슴을 열어 보이며 수유할 상상을 하니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엄마 혼자 사는 친정과 달리 시댁에는 아가씨도 살고 있었다. 나는 친정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리원 방에 앉아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통화연결음을 따라 심장도 같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엄마가 전화를 받고, 나는 우리 상황을 이야기했다. 엄마는 말끝을 흐렸다. 단단하게 빚어서 준비해둔 마음에 금이 가고야 말았다.


 “아니…. 우리 집은 외풍도 있고, 나 서방도 힘들 것 같고…..”


시댁이 친정보다 신랑 회사와 가까웠고, 새로 산 우리 집하고도 가까웠다. 친정은 20평대 빌라인 반면 시댁은 30평대 아파트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엄마는 신랑과 아기에게 시댁 환경이 더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조리원을 나와서 시댁으로 들어갔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엄마의 반응에 나는 새삼스럽게도 마음이 아팠다.



  엄마는 민망하게 거둬들인 손으로 가방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꺼냈다. 신랑과 엄마가 부엌으로 가고, 나는 반질반질 빛을 받는 검정 비닐을 풀었다. 봉지 안 반찬통 뚜껑을 열자 윤기가 흐르는 허연 밀가루 조각이 나타났다. 밀가루 사이로 초록색 부추가 빼곡히 박혀있었다.


 “엄마, 부침개네?”

 “응, 그거 아침에 한 거야.”


큼직하게 잘린 부침개가 커다란 반찬통에 한가득 있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부침개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익숙한 향이 입 안에 퍼졌다. 고소하게 씹히는 부추 사이로 다른 향을 내는 재료가 어금니에서 터지듯 씹혔다. 이내 알싸한 향이 강렬하게 퍼져 나갔다. 청양고추였다. 그동안 잊고 있던 맛이었다. 칼칼하게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식탁에는 음식이 하나씩 찼다. 곧 오빠네 부부가 도착해서 4인용 식탁에 친정 식구가 모여 앉았다. 나는 눈을 비비는 아기를 재워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방에서 아기를 눕히고 토닥였다. 식탁을 차리려고 바쁘게 움직이던 일이 꽤 오랜 전 일처럼 느껴졌다. 분주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방에서 아기만이 분주하게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아기는 쉽게 잠들 것 같지 않았다. 방 문 너머로 식사 소리, 대화 소리가 뭉개져서 들려왔다. 사실 아기가 자지 않고 계속 뒤척여줬으면 했다. 친정 식구와 함께 식사하지 못할 어쩔 수 없는 구실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침개 맛이 입안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운 맛에 그리운 기억도 딸려왔다.



  초등학생 때, 엄마는 오빠와 내게 종종 부침개를 만들어줬다. 엄마가 반죽을 만들면 나는 엄마 옆을 기웃거렸다. 언제 반죽을 부칠까 잔뜩 기대에 차서 기다렸던 것이다. 부엌을 나와 오빠랑 놀다가도 ‘타 타탁’하고 기름 위에 반죽이 부어지는 소리가 나면 다시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갔다. 오매불망 부침개만 기다리는 오빠와 내게 급하게 내어줬던 첫 번째 부침개는 늘 바삭함이 부족한 상태였다. 엄마는 못 내 아쉬워서 좀 더 부쳤으면 더 맛있었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오빠와 나는 부침개 접시에 얼굴을 모으고 앉아서 바삭한 부침개 끝자락을 서로 차지하려고 젓가락질을 해댔다. 엄마는 두 번째 반죽도 프라이팬 위로 바삐 부었다. 눈 깜짝할 사이 첫 번째 부침개가 사라지고, 결국 두 번째 부침개도 바삭거리는 식감을 포기했다. 우리 남매는 엄마 다리 옆에 앉아서 바닥에 접시를 두고 부침개가 나오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때의 부침개 맛이, 그때 올려다보던 가스레인지 앞 엄마 뒷모습이 기억 속에서 선명해졌다. 오빠나 내가 “엄마는 안 먹어?”하고 물으면, 엄마는 우리 먼저 먹으라고 말하고 계속 부침개를 부쳤다. 그 시절 엄마 부침개에는 항상 청양고추가 들어 있었다. 엄마 부침개는 지금도 같은 맛을 내고 있었다. 톡톡 입안을 두드리는 알싸한 청양고추 향이 마음까지 두드리는 것 같았다.


  부침개 속 청양고추가 가져온 기억 속 엄마는 따뜻했다. 어쩌면 따뜻한 기억들이 어딘가 꼭꼭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나도 사랑받은 기억이 있을 텐데. 슬프고 힘든 기억들이 서로를 소환하며 인과관계로 촘촘히 그물처럼 엮여서 다른 기억을 숨겨놓은 모양이다. 그물 밑 기억을 하나씩 찾다 보면 내가 사랑받았던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결국 잠들지 않은 아기를 안고 거실로 나갔다.

  “어서 와서 먹어라.”

엄마는 내게 손짓했다. 식탁을 보니 이미 한 차례 식사가 끝난 상태였다. 신랑과 오빠가 아기를 데리고 가서 놀았고, 나는 엄마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래, 출산한 딸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지 못했던 엄마 마음도 편치는 않았겠지. 나는 몇 조각 남지 않은 부침개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청양고추 향이 다시 맛봐도 여전히 좋았다.



[사진] 드라마 <고백부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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