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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un 27. 2021

카트리지 연필이 가져온 내 20대

  그날도 봄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안개꽃에 형광 물을 들인 것 마냥 나무의 여린 잎사귀들이 햇빛에 빛나고 있었을까. 대학교 3학년 봄학기가 시작되는 3월의 캠퍼스 풍경이 기억 속에서 흐릿하다. 다만 봄 햇빛만은 지금처럼 눈부시고 따뜻했다.


  학기가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학교를 계속 다닐지 결정하지 못한 채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강신청을 할 때는 개강 전까지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4-500만 원의 돈이 쉽게 생길 리 만무했다. 


  그날도 동기와 T동 4층 화장실에서 화장을 하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고 있었다. 웃음소리만큼 밝은 봄 햇빛이 화장실에 가득 차 있던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가 퉁명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물었고, 나는 의심을 잔뜩 담아 맞다고 대답했다.


  “왜 장학금 신청 안 했어요?”


퉁명한 목소리가 다짜고짜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동기와 함께 있는 T동 4층 화장실에 검은 그림자가 밀고 들어왔다. 화장실에서 더 이상 봄 햇빛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일단 학과 사무실로 오라고 이야기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6층에 있는 학과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문 앞까지 차있던 새하얀 빛이 문 뒤로 물러났다. 문이 모두 열리자 빛은 정면 창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가운 회색 바닥, 입식 데스크, 입식 데스크 안쪽 업무공간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업무 공간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 뒤 창문에 가득 찬 햇빛 덕분에 남자 몸에는 음영이 졌다. 남자는 밝은 색상의 옷을 말끔하게 입었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학과 사무실 조교이었다.


  “왜 장학금 신청 안 했어요?”


전화 목소리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마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학생을 시켜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목소리는 바뀌었지만 질문은 여전히 나를 쏘아붙이는 것 같았다.


  ‘왜’라니. 내 안에 수많은 ‘왜’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왜 나는 등록금을 내지 못하고 있는지. 왜 일 년 간 휴학하고 돈을 벌었는데도 학교를 한 학기밖에 다닐 수 없었던 건지. 왜 엄마는 내가 모은 돈을 뺏어다 군 제대한 오빠의 등록금으로 썼는지. 분명 지난 학기에 좋은 학점을 확보했는데, 왜 장학금을 신청도 못한 건지. 왜 장학금 신청 요건에는 봉사활동 시간이 필수여야 하는 건지.


  나는 어쩐지 변명해야 할 것만 같아서 어버버 하며 입만 벙긋거렸다. 겨우 목소리를 내서 봉사활동 시간이 부족해서 장학금을 신청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어디선가 헌혈 한 번만 하면 되지 않냐는 퉁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학교는 장학금 신청서를 접수한 학생들에게 성적순으로 장학금을 제공했다. 장학금 신청서에는 봉사활동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고, 봉사활동 시간은 헌혈증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헌혈 한 번 하면 되지 않냐는 말이 내게는 장학금을 신청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안 한 것 아니냐는 비난으로 들렸다. 사실 나도 헌혈증을 제출할 생각이었다. 아르바이트로 꽉 채운 내 스케줄에 봉사활동까지 끼워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막상 장학금 신청기간에 헌혈을 하려니, 체중미달로 할 수 없었다. 학과 사무실에서 나를 불러다 취조하는 것만 같았다. 등록금 납부 기간이 지나고 추가 납부 기간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아직도 등록금을 내지 않았다고 말이다. 나는 그곳에 서서 변명을 해야 했고 자꾸 작아졌다.

 

  조교는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조용히 조곤조곤한 말투로 어느 교수님께 한 번 가보라고 이야기했다. 안타깝게도 방학 중에 장학금 공고문을 보고 이미 교수님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장학금은 나와 연결되지 않았다. 조교는 자신이 말해두었으니,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다시 한번 가보라고 조용히 타일렀다.  


  나는 조교 말대로 교수님 연구실 문을 다시 한번 두드렸다. 당시 교수님은 연구를 도와줄 학생을 찾고 있었고, 3학년 수업을 수강한 학생을 장학금 대상자로 찾고 있었다고 했다. 이제 3학년을 시작하는 나는 적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내게 장학금을 주기로 하셨다. 끝날 거라 생각했던 대학생활이 연장되었다. 그 후, 조교는 내가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해주셨다. 학과 사무실 근무시간은 교내 봉사활동 시간으로 인정되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봉사활동 시간 걱정 없이 학교 장학금을 신청할 수 있었다. 조교는 일 년 뒤에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면서 학과 사무실을 떠났고, 그 일 년 뒤 나는 좋은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장학금을 주신 교수님은 내 인생의 소중한 멘토로 남으셨다. 하지만 조교와는 따로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다.  




  나는 살아내는 게 습관이 된 건지 직장인이 돼서도 절실하게 삶을 살아냈다. 그런 날들 중 어떤 날은 조교와 교수님이 생각나기도 했다. 내게 그분들처럼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내일 또 다가오는 출근이 그리 절망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조교에게 제대로 감사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뒤따랐다. 직장인 초년차 시절에 어느 날, 학과에 수소문해서 조교 연락처를 받았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쩐지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을 머뭇거리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덕분에 졸업도 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고.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조교를 다시 만난 그날도 봄날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조교를 만났다. 나는 조교 앞에서 예전처럼 어버버 거렸다. 반면 조교는 여전히 말끔하고 차분했다. 식사는 하지 않고 카페에서 이야기만 나눴던 것 같다. 조교는 어색해하는 나 대신 더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내게 책 한 권과 펜 하나를 선물로 주셨다.


  조교가 준 펜은 조금 특이했다. 외관은 펜과 같았는데, 두꺼운 연필심이 끼워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트리지 연필이었다. 파란 몸체에 ‘STAEDTLER Mars technico’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 앞에는 ‘GERMANY’라는 글자도 조그맣게 보였다. 그립과 클립 부분은 메탈이라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기는 펜이었다. 조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 펜을 공책에 끄적인다고 하셨다. 회사에서 딱히 일이 없을 때 이런 펜 하나 쥐고 끄적이고 있으면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냐고 말씀하시고 웃으셨다. 너무 회사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금방 방전돼서 회사를 떠나더라는 말도 하시면서 내게 뭐든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학 때와 다름없이 절실하게 살아내고 있는 내 직장생활을 들킨 것 같았다. 조교 눈에는 잘 차려입고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는 내 모습 뒤로 방전되어 가는 내 모습이 보였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허둥대며 조교와 헤어졌다. 그날 이후, 조교에게 받은 펜을 회사 생활 내내 사무실에 두었고, 결혼하고는 신혼집 거실 책상 위에, 아이를 낳고 이사 한 뒤로는 안방 화장대 위에 두었다.   


  30대의 봄날에도 봄 햇빛은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안방 화장대 위에 카트리지 연필을 발견하고는 조교를 만났던 20대 봄날들을 마주한다. 그때 세상의 중심은 나였다. 내가 겪는 일이 가장 힘들었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내가 받은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은 금방 흐릿해지고, 다시 살아내는데 몰두했다. 절실히 살아내려 했던 내 청춘이 아프고, 나밖에 보지 못했던 내 20대가 부끄러워서 카트리지 연필을 향했던 고개를 돌린다내 대학시절은 돌아보고도 더 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은 날이 오면, 그때는 카트리지 연필을 보고 조교에게 감사한 마음만을 온전히 떠올릴 수 있을까.






[사진]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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