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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May 24. 2022

461개의 도시락

무엇이 들었을까 늘 기대되는 도시락.


오랜만의 일본 영화, 461개의 도시락.





일본 영화에는 아기자기함이 있다. 

CG 없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일본의 예술 영화를 좋아했다. 

대체로 내가 본 일본 영화들은 정적이었다. 영화가 종합예술이라지만 일본 영화들은 스토리 중심이었고 극적인 전개 없이 잔잔하고 소소한 일상을 다루며 흘러가는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되고 있는 최근의 한국 시리즈들, 킹덤,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처럼 시선을 끄는 강렬함, 매운맛도 없었다. 


한마디로 밋밋한 느낌. 영화를 입체적으로 연출하는 방법도 많을 텐데, 대체로 평평했다. 

그런 영화만 좋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떤 일본 영화들은 밍밍한 평양냉면처럼 먹을 때는 감칠맛이 없는데 정작 며칠 지나고 생각이 나는, 그런 여운이 있는 명작들도 꽤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밋밋하게 흘러가는 일본 영화 한 편을 다 보기가 어려워져서 중간에 자주 보다가 포기하고는 했다. 그런데 왠지 이 영화는 제목부터 꼭 봐줘야 할 것 같은 호기심이 생겼다. 



461개의 도시락


영화는 이혼한 아버지와 고등학생 아들.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부모의 이혼 갈등으로 아이는 고등학교 입시에서 실패한다.  재수 끝에 고등학교 진학을 하는 아들 코우키. 뮤지션인 아빠는 아들에게 고3 내내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 약속의 응답으로 코우키는 학교를 빠지지 않고 매일 등교하기로 한다.


아빠의 첫 도시락. - 뮤지션이라 가사에 관심 없을 것 같지만 숨은 실력자인 듯하다. 아들이 아주 맛있어한다.


아빠 카즈키는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아빠의 도시락 덕분에 유급생 코우키에게 친구들이 생겼다. 저 나이대엔 1살 차이가 엄청 큰 터울이다. 학기 초반에 코우키는 친구를 사귀지를 못한다. 그러나 아빠의 도시락은 친구들을 만들어주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많은 아이들이 밥을 사 먹으러 나간다. 그러나 코우키에겐 아빠의 도시락이 있다. 

매일매일 어떤 도시락이 나올까.. 아마 코우키도 점심시간이 궁금하고 기다려졌을 것 같다.

코우키의 맛있는 도시락에 이끌린 착한 친구들이 단짝이 되어주었다. 


아빠는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온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도시락을 쌌다.

성실하게 꾸준히 뭔가를 지속한다는 것이 정말 힘든데, 그게 도시락이라니.

내겐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어떤 날은 도시락이 실패하는 날도 있었지만 아빠는 멈추지 않고 461개의 도시락을 완성하며 아들과의 약속을 지킨다.


도시락은 마치 고등학생이라는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유리알처럼 깨지기 쉬운 코우키의 인생을 잡아준 보이지 않는 동아줄 같았다.

아빠의 461개의 도시락은 매일매일 서서히 코우키의 인생에 스며들어 아이를 건강한 영혼으로 성장하게 해 주었다.



영혼의 에너지, 집 밥


엄마는 최대 6개의 도시락을 쌌다.

네 남매였던 우리가 도시락이 필요한 중고생을 꼭 3명씩은 겹쳐 다녔기 때문이다.

그 당시 최고의 보온력을 자랑하던 일본의 조지루시 코끼리 도시락을 엄마가 사줬을 때는 기분이 너무너무 좋았다.

엄마는 점심 도시락은 일반 도시락으로 저녁 도시락은 보온 도시락으로 싸주었다. 

저녁 도시락까지 먹고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 

저녁 햇살이 넘어갈 때쯤 우리는 도시락을 먹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왠지 좀 서글프다.

무엇을 위해서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식어버린 엄마의 도시락이 그래도 그런 나를 위로해주는 하나의 힘이었다.


그 당시 내가 처음 본 양상추, 비엔나소시지, 소고기 동그랑땡을 싸오던 내 친구들 대비

우리 집 마른반찬들로 엄마가 싸주신 나의 도시락은 초라하고 너무 평범했다.

그때는 밥도 진짜 많이 남기고 도시락 투정을 엄청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집 밥 만한 밥도 없다.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하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감정이 왔다 갔다 했던, 

그 시절 나의 도시락이 그립다.




여행스케치의 '집 밥'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 BGM으로 사용되었던 노래.

요즘도 가끔 듣는다.



여행스케치 '집밥'


집 밥이 너무 그립다 집 밥이 너무 그립다

바깥 밥에 이젠 정말 물려버렸다 헤이 밥

숭늉이 너무 그립다 장국이 너무 그립다

연탄불 고등어가 더욱 그립다

일품 향신료와 그럴듯한 레시피에 길들여져도 오오

소박하지만 구수했던 울오마니의 깊은 손맛과 밥밥집 빱밥

기름 발라서 굽지도 않은 파래-김과 저 푸른 초원 김치뿐인 찬도

모락 모락 연기가 나던 오마니의 사랑이 손맛이

오늘따라 왠지 집 밥이 너무 그립다


헤이 밥

사람이 너무 그립다 사랑이 너무 그립다

넉넉한 친구들 곁에 있지만 헤이 밥

식구가 너무 그립다 가족이 너무 그립다

다정한 이웃들 가까이 살지만

달달한 서비스 왁자지껄 맛집, 멋집에 솔깃해져도 오오

수수하지만 수줍은 듯 감칠맛 나던 그 때 그 밥상 밥밥집 빱밥

기름 발라서 굽지도 않은 파래-김과 저 푸른 초원 김치뿐인 찬도

모락 모락 연기가 나던 오마니의 사랑이 손맛이

오늘따라 왠지 집 밥이 너무 그립다

산해진미가 멋스러워 오 온 몸에 감동이 와도, 맘속에 빈자린

동치미로 청국장으로 오감을 채우던 행복한 기억들,

엄마가 너무 그립다 집밥 그립다 그 사랑

그립다



울 엄마가 싸주셨던 도시락과는 완전 질적으로 다른 461개의 화려한 도시락에 눈도 입도 즐거웠던 영화.

그러나 도시락 속에 촘촘히 스며있던 엄마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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