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신 이후 낮에는 매일 매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카톡 알림만 와도 깜짝 놀라거나 식은땀이 났다.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워있으면 동물처럼 꺼이꺼이 몇 십분씩 울다가 잠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말 없이 등만 토닥여 주었다. 한국에 내가 있는다 해도 이제는 정말로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것, 그리고 한국 체류 가능 가간이 무한정이 아니기에 아버지 돌아가시게 된 이후 써야 한다는 냉정한 사실이 당장 한국으로 날아갈 수 없다는 기계적 정당성을 부여했을 뿐이다.
일상에서는 평온함과 괜찮음을 연기했지만 조금만 건드리면 터져버리는 슬픔과 불안감 때문에 사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편으로 아버지를 앞서 잃은 모든 이들이 나 정도의 쓰라림으로 아픈지도 궁금했다. 사십 넘은 내가 매일 같이 우는게 정상인가? 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러고 있지?
나의 오랜 친구의 카톡이 고마웠다.
"그래 독일서 실컷 울어
기도할게. 아버지 마음과 너의 가족들 마음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 인사 나눌 수 있기를"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여기서 실컷 울고 들어가자. 여기서 충분히 쏟아내면 들어가서는 씩씩하게 아버지를 만나고 엄마와 형을 챙길 수 있을테니 오히려 좋아.
매일 매일 전화를 보이스톡으로 연락을 드리면 아버지는 시설도 좋고, 밥도 잘 먹고 너무 잘 지낸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셨다. 그러나 전화를 하는 나는 아버지의 미세한 음성의 변화나 떨림을 감지하기 위해 또 초능력을 발휘했다. 아버지가 혹시라도 낙담하는 뉘앙스를 비치는건 아닐지, 진짜 괜찮은 건지... 그래야 언제든지 공항으로 튀어갈 수 있으니까. 실제로 뇌전이 등이 겹쳐서 내용 중 30%는 섬망 증상에 해당하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내가 아는 어떤 분을 갑자기 욕하면서 화를 내기도 하셨다. 말려 들어가는 혀, 같은 단어와 문장의 반복, 가래끓는 쉰 목소리 같은 것들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달력에 우리가 전화한 날마다 달력에 꼬박꼬박 기록해 놓으셨다, 엄마에게는 나랑 통화한 내용으로 그대로 또 전화해서 좋아하셨다. 며느리가 전화하면 더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귀엽고 착한 며느리가 너무 예쁜데 늘 어쩔 줄 몰라하셨다.
"OO야, 너는 모를거다 이 애비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딸 없는 우리집에, 성질 괴팍한(?) 둘째랑 결혼해서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을 매번 하셨다고 한다. 심지어는 나한테는 한 번도 못준 몇십만원 용돈을 며느리한테는 쥐어주기도 했다.
예정된 시간이 드디어 찾아왔다.
월요일 오전에 형이 연락을 주었다.
지금 한국으로 들어와야 할 것 같다고.
드디어, 그 시간이 왔구나. 손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한 자리 남아있는 당일 항공편이 있어서 다시 그걸 예약한 후 차분하게 간단히 보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바로 노트북을 덮었다.
HR은 나의 긴 한국 체류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을게 뻔해서 무시하고 나왔다. 정말 이 문제로 딴지를 건다면 디렉터에게 이야기 하고 사표까지 낼 생각도 했다. PO인 나 없이 이 프로젝트 진짜 될 것 같아? 내가 오늘을 위해서 아쉬운 소릴 해도 떳떳할 수 있게 얼마나 개처럼 일했는데?
이미 옷가지 몇벌, 그리고 검은 양복, 검은 넥타이를 넣은 캐리어는 며칠 전 부터 거실에서 대기 모드였다. 한국에서 연락오면 총알처럼 공항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말씀해 주신 교회 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다. 그 이후에 어떻게 인천공항에 내릴 때 까지 아무런 기억도 없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열네시간 반 이후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저 아버지가 숨이 붙어계셨으면 하는 그 생각 하나만 했던게 기억날 뿐이다.
내리자 마자 또 속도위반을 해가며 용인에 도착했다.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 PCR 검사고 뭐고 하지 말고 당장 와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더 조급했다.
그런데 웬걸?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형이 그랬다. 괜히 오라고 설레발 친 것 같다고. 상태가 너무 호전되어 보여서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난 건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숨도 잘 쉬시고, 가래끓는 소리도 안나고 다시 식사도 하신다니? 시력도 좀 회복한 것 같다고. 이게 혹시나 말하던 기적인걸까?
비행기에서 내린 꾀죄죄한 모습 그대로 아버지 병상으로 갔다.
정말 아버지는 시력도 회복하신 듯 나를 알아보시고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셨다. 손발은 차가웠다. 근육이 많이 빠진 줄 알았는데 내 손등 사이로 전해지는 그 악력이 내 눈물을 짜내려 했다. 그렇게 맨날 얘기하시던 <독일 작은아들> 보고 가시고 싶어서 꼬박 이틀을 견디면서 기다리신 거라고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분들이 말씀해주셨다. 엄마도 형도 그렇게 말했다. 멋있게 잘 견디셨으니 이제는 그만 작별해도 된다는 말로 문장이 연결되는 것만 같아 그 말도 애써 모른척 했다. 물론 독일에서 내 침대위 베게에 쏟아놓은 눈물이 너무 많아서 인지 아무렇지 않음 연기가 나름 괜찮았다.
"아버지 저 이렇게 건강하게 잘 키워주셨는데, 이제 저랑 또 등산 가셔야죠. 지난 주에 저랑 통화하실 때 여기 공기도 좋아서 저한테 보여주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내일 저랑 가요"
코로나로 인해 호스피스 병원의 간병인 출입 규정은 까다로웠지만 그걸 따라야 해서 금방 나가서 PCR 검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섬망 증세가 좀 더 있지만 어쩌면 반나절도 더 버티실 수 있지만 장담은 못한다 했다. 진통제를 한번 더 맞고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모습을 보았다. 어차피 엄마와 형은 간병이 어려우니 내가 최대한 빨리 PCR 검사 받고 곧 들어오겠다고 병원에 알리고 나왔다.
딱 한시간을 달려 아주 잠시 집에 들르자 마자 다시 연락을 받았다.
......
...
인생에서 딱 한번 경험할 이 날을 위해 나는 수백번 넘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 왔다. 효과는 있었다. 밤 아홉시에 다시 용인으로 내달리는 국도에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1/4만 주유되어 있는 이 차가 50km 남짓 거리의 호스피스 병원까지 간 후 다시 장례식장 까지 갈 수 있을지 고민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아버지가 누워 계신다. 순백색의 옷을 입고 편안하게 누워 계신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지만 내가 마주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만지기에 앞서 이제 다시는 할 수 없는 일 - 아버지의 모습을 손으로 만지고 싶었다. 손에 만져지는 감각으로 내게 새겨야 했다. 다시 보니 콧등에는 시력을 많이 상실하셨는데도 잘 보겠다고 마구 쓰다가 안경 코 받침에 배긴 작은 상처들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거무튀튀한 턱수염도 보였고, 아버지의 어린시절 별명인 쩜새이의 이유인 턱밑의 큰 점도 그대로 있었다. 항암을 중단했기 때문에 다시 파릇 나기 시작한 머리털은 자원봉사자 분들이 곱게 빗겨 놓으셨다.
이제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사는 거구나.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 <천붕> 의 참 의미를 그제서야 알았다.
육체에 남긴 영혼의 흔적이었을까 하얀색과 노란색이 섞인 아버지 얼굴, 수의를 단정하게 입으신 아버지의 평온한 표정에 눈물이 울컥 나왔어야 했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앰뷸런스 기사님과 한달 동안 천사처럼 돌봐주시던 호스피스 병원 분들께 딱 15분만 달라고 하고 문을 닫았다.
입을 벌려 그에게 유독 인색하고 야속했던 절대자에게 기도했다.
"회한많은 이 인생, 고단한 이 인생 편안한 곳에서 쉴 수 있게 거두어 주세요. 바보처럼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불평도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이 영혼을 가장 편안한 곳으로 인도해 주세요"
임종 후에도 수 시간 동안 감각별로 순차적으로 사라지지만 그 중에서도 청각은 살아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나는 이 기도를 목소리를 크게 내어 무릎꿇고 드렸다. 이 짧은 시간이 나에게 단독으로 특권처럼 허락될 수 있어서 다행히 나는 입관 예배 때도, 운구차에 오르실 때도, 화장 예배 때도 울지 않고 견디며 오열하며 졸도하려는 엄마를 지켜드릴 수 있었다. 아버지와 추억이 더 많은, 사실 나보다 더 긴 시간을 아버지를 마음으로 지켜준 형이 입관때 서럽게 울 때도 나는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차가운 장례식장에서 며칠을 보내시기 위해 다시 시신은 구급차에 실려진다.
흔들리지 말라고 아버지의 팔을 교차하고 천으로 동여매듯 말려 고정되고 아버지는 이제 차에 오른다.
그 장면을 덤덤하게 바라보지만 아직 현실감이 없다. 그저 이게 아버지와 단독으로 있는 마지막 시간이구나. 나는 장례를 치를텐데, 관에 들어가실 때 까지 차갑게 계시겠구나... 청각도 아직 살아있는 거면, 다른 감각도 남아있겠지? 저렇게 단단히 동여매는데 아프시지는 않을까? 아니, 빠져 나가지 않은 영혼의 일부와 다른 감각도 아직 남아있어서 추운 장례식장 냉장고에서 외롭고 춥다고 느끼시는 건 아닐까? 말도 안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장례식장에서 부고문을 만들어서 보냈다. 미리 적어온 리스트와 문구가 있었는데 어디 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게 밤 열한시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준 친구들이 기억난다. 장례식 그날 새벽 두시에 서울에서 택시타고 온 친구도 있다. 아직 꽃으로 수놓을 빈소가 마련되지는 못했지만, 활짝 웃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은 놓여 있었다.
엄마와 형을 집으로 보내고 나 혼자 빈소에 누워서 마치 크게 인쇄된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아버지인 것 처럼 누워 올려다 보며 잠을 청했다. 오늘만은 내가 정말 아버지를 지켜드리고 싶다. 아버지와 단 둘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과학적인 말은 아니다. 이미 영혼은 육체에 깃들여져 있지 않다. 그러나 나에게도 의미가 필요했다. 인과관계나 원리의 이야기가 아닌 영성의 세계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 죽을 때 까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있을 그런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오늘부터 아버지가 없는 나의 삶이구나. 이제 내일부터 해야 할 일들과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위로해 주는 사람들의 마음 덕분에 슬플 틈을 찾지 못할테니 눈물을 내지 않아도 되겠지? 납골당에 모시기 전까지, 아니 엄마와 형이 나 없이도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맘편이 나갈 때 까지는 절대 눈물 보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사명같은 비장감이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이 공항에 내리자 마자 다섯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해외에서 가족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많은 분들이 그래도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짧은 몇분 마저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면 나는 천형을 받은 듯한 무게의 먹먹함을 계속 이겨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이 글을 통해 고백하고 싶은게 따로 있다.
걱정이 늘 많은 아버지의 마지막 그 순간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내가 가장 약한 부분이 드러났던 두려움이다. 쓸데없이 섬세한 나의 성정이 연약함으로 발현될 것 같아 겁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할 수 만 있다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기다려 주신 것도, 또 고통스럽게 힘들어하시다 가시는 모습 대신 내가 나중에라도 힘들지 말라고 편안하게 잠드시는 걸로 마지막도 나를 위해 매듭지어 주신 거라고 믿고 있다. 음...아버지는 날 잘 아니까, 그리고 내가 가장 당신을 닮았으니까 그러신 거라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무연고자와 어르신들의 임종을 지키고 도와온 고모는 입관때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평온한 얼굴인거면 분명히 잠든 시간도 고통이 없었을 거야, 하늘에서 천사가 와서 편안하게 데려간게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