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인 Feb 01. 2023

남겨진 자들의 일

아버지와 내 우주의 짧은 교차 시점

부고문 발송과 동시에 시작된 장례는 시끌벅적했고, 뜨거웠고, 끈적했다.


나의 관계만이 중요하다고 해서 스몰웨딩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단순히 돈문제가 아니다), 며칠간 이어지는 왁자지껄 장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강력한 충격을 맞닥뜨리는 순간을 비껴나가 슬픔에 직면하는 시점을 유예시켜 준다.


내가 아는 아버지가 아닌, 그의 세계가 기억한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자 서로 떨어져 있던 나의 세계와의 일부도 만나는 특별한,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납골당에 모시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이 따뜻했고, 감사했다. 아버지가 떠나셨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3일 내내 잠을 잘 수 없었다. 잘 수 있었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떠나온 시골에서 추억을 공유하던 가깝고 먼 친척들,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일하던 회사분들이 열명 넘게 찾아오셨다. 일흔 넘은 할아버지의 고용을 그 회사는 최대한 지켜주었고, 노장임에도 30-40대 아들뻘 직원들과도 뒤처지지 않는 체력으로 일하셨다는 걸 짐작만 해 볼 뿐이다. 밖에서도 추한 노인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소소한 존경받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겨우 짐작해 본다. 따로 그분들이 앉아 계신 자리로 갔다. 그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생전에 동료로 계셔주셔서, 함께 일해주셔서, "우리 아빠한테 잘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고 머리를 숙여 인사드렸다.


한국을 꽤 오래 비운 삶을 살아왔음에도, 아버지를 모르지만 빈소로 찾아온 나의 친구들과 선후배들의 이름과 얼굴도 하나하나 새겨 두었다. 살면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감의 에너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것이 무한대는 아니다. 나에게 그 마음을 할당해서 잘라 주었다면 누군가가 받아야 할 것을 대신 받았다고도 생각해서 그 마음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가 겪은 어떤 일로 여기지 않고, 마음의 촉을 나에게 뻗어서 걱정해 주고 도와주고 울어주신 소중한 분들의 이렇게 크게 확인할 수 있어서 그래도 인생을 살아볼 만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평생 그 마음들을 확인할 수 없었겠다 싶기도 했다.

 

그래,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사실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제외하면 결코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믿는다.


단지 몇 마디의 조언을 해주었는데도 마치 그것을 북극성 삼아서 달려간 덕에 미국에서 멋지게 성공한 어떤 친구는 나를 평생의 귀인이라고 표현해 주었고, 어떤 친구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독일에서 나를 살려준 멘토라고도 했고, 형이라고도 했다. 각자가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의 최대치로 나를 걱정해 주었다. 먼저 아버지를 잃은 적이 있는 내 친구는 간병하는 1년 가까이 기동력이 필요할 거라며 차 한 대를 선뜻 빌려주기도 했다. 어떤 선배는 아버지 돌봄을 시작한 나를 만나서 봉투에 입이 떡 벌어질 거금 봉투를 필요할 때 긴하게 쓰라며 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것도 기억난다. 어떤 친구는 전화통을 붙잡고 30분 내내 대신 울어주기도 했다(?? 이복동생 아닌데...). 어떤 선배 둘은 쿨하게 장례식장에 딱 10분씩 그러나 세 번을 오고, 발인 때 상여 드는 일을 하더니 또 세상 쿨하게 사라지졌다. (평일 오전 상여 드는 장정 숫자가 모자라는 경우가 왕왕 있음을 아는 노련미와 멋짐에 감동했다). 일곱 시간 여덟 시간 넘는 거리를 아까워하지 않고 조문한 분들도 계셨고, 부고문 받자마자 경쟁하듯 달려와서 만들어지지도 않은 빈소에서 나를 만나준 친구들도 있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인데도 이런 게 가능하다니.


엄마는 그게 내 빚이라고 했지만 그건 돈과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한 순간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진심이다, 책임이고, 연결이고, 사랑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내게 주어진 책무이자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나보다 앞서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보낸 사람들에 대한 무심했음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앞으로 이런 일을 겪을 사람들도 생각했다. 공으로 받은 이 마음들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족들이 상상하는 나의 세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의미 있게 이어가고 있는지도 잘 아셨던 것 같다. 나는 참 좋았다. 영정사진에 큰 절 올리고 간 분들 중에는 돈 많은 사업가 형도 있었고, 대학 교수들도 있었고, 돈 잘 버는 친구들도,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도 많이 왔다. 나는 가진 것 자랑하는 것만큼이나 인맥자랑하는 거만큼 없어 보이는 거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날만큼은 속물같이 아버지에게 티 내고 자랑하고 싶었다. 스타트업을 갓 창업하고 투자를 받으러 동분서주 중이던 후배가 보낸 화환은 유난히 빛났다. 내가 뭘 공부하는지,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셔도 배움이 부족해서 나는 잘 모르겠다며 머리를 긁으셨는데, 내 친구들을 보면서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테니... "이렇게 잘 살아왔어요!"라고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장례식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입관이다. 가족과 아버지 형제자매들이 며칠간 차갑게 보관된 아버지의 육신을 만져도 보고, 마치 그 영혼이 그곳에 깃들어있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드릴 수 있는 시간이건만, 1년 가까이 단단한 의지로 포기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처분 같은 것 같았다. 엄마와 다른 가족들이 우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통곡으로 이어지게 둘 수 없었다. 아니 엄마와 형이 대신 울어줘서 내가 울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날 수원 연화장에서 아버지의 육신은 회색 뼛조각, 그리고 아버지를 정말 잃는 것을 확정하듯 곱게 빻아진 후 금속 쓰레받기를 타고 항아리에 모셔졌다. 예정되어 있는 순차적인, 기계적인, 비 가역적인 처리였다. 누구에게 폭발해야 할지 모를 야속함, 분노, 서글픔, 무기력함이 한꺼번에 섞여 있었지만 표현되는 감정은 허망함이었다.


연극이 끝났다. 근데 이건 그냥 일이라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정말 힘들었던 건 이제 정말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실감하니 모두가 우리 가족을 등지고 세상에 툭 던져진 어색하고 황망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 각자의 방법으로 애도하고, 아버지를 마음에서 보내드리는 일이 남았다.


아, 뒷정리를 해야 한다. 아버지의 유품과 세상에서의 흔적을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엄마와 형에게 이야기했다. 아버지 물건 하나도 손대지 말라고. 이것 만큼은 내가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옷가지나 물건들을 정리하고 버리는 일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피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등산화, 당신의 유일한 자산인 체력 관리를 위해 존재하던 각종 운동기구들, 현장에서 쓰던 무지막지한 공구들, 배움을 채우고자 시작한 공부를 위해 형이 가리지 않고 사준 각종 책들, 한사코 쓰지 않겠다고 고집부리시던 지팡이, 날짜별로 정리된 일기장, 꼼꼼하게 한일/할 일을 적은 탁상 달력... 물건들을 만질 때마다 아버지의 녹아있는 기억이 내게 기억으로 감전처럼 전이되는 것처럼 강렬하고 아팠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보낸 "휴학" 신청 메시지에도 내년에 학업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

나머지 일들도 잔인하리 만큼 신속하고 정확했다. 각종 계좌, 통신요금, 보험, 그리고 그 마지막은 사망신고서 제출로 끝이 난다. 사망신고서 제출 전에 아버지가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등본도 떼고, 제출된 이후에 [사망]으로 뜨는 종이를 보고서 또 한 번 더 슬퍼했다.


이제 아버지는 기록으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75년 넘게 살아오신 한 인간의 서사의 종말 치고는 너무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누군가한테 화를 내고 싶었다. 병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묻기 힘든 것처럼 멍청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천붕, 그날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