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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Jan 04. 2021

어쨌든, 새해

어쨌든, 또 다른 새해가 시작되었다

많은 이들이 지워버리고 싶은 한 해였다고, 한 것도 없이 지나가버린 한 해였다고 한탄하는 2020년이었지만,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송년회를 할 수도 없는 어딘가 허전한 연말이었지만, 제야의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새해 일출을 보러 바다에 갈 수도 없는 12월 31일이었지만, 어쨌든, 새해가 밝았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건 그저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가는 것일 뿐, 4월 23일에서 4월 24일로 넘어가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되뇌면서도, 어쩐지 이 하루는 유독 하고 싶은 게 많다. 홀로 있기보다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핑계로 연락도 해보고 싶고, 레토르트 떡국이라도 끓여먹고 싶고, 지나간 한 해를 되돌아보고 싶고, 안 지킬 게 뻔한 새해 목표도 다시 한번 세워보고 싶고. 문득 인간 세계에 '年'이라는 개념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새해의 특별함을 알지 못한 채 24240월 31일에서 24241월 1일로 무심히 달력을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그런 달력이 있다면 얼마나 두껍고 무거울까.)


몇 년 만에 온 식구가 모여 송구영신을 했다. 한 달 후에 언니가 결혼을 하면, 아마도 우리 네 식구가 모여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식구가 다 모였을 때 쓰기 위해 유효기간 연장에 연장을 거듭했던 엄마의 피자 쿠폰과 케이크 쿠폰, 그리고 나의 치킨 쿠폰을 모조리 사용하고, 언니와 예비형부가 선물한 와인까지 곁들이니 누가 봐도 그럴싸한 연말 저녁 식탁이 차려졌다. 평소 같으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최근에 누가 어쨌다더라 하는 신변잡기나 언니와 나는 기억 못 하는 우리의 어린 시절 같은 옛날이야기가 식탁 위를 오고 갔겠지만, 이번에는 돌아가며 본인에게 2020년은 어떤 한 해였는지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다.




2020년의 아빠는 한 마디로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 기회를 틈타 아빠는 미루고 미뤘던 임플란트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셨다. 앞니 7개가 빠진 아빠의 모습 자체도 이빨 빠진 호랑이를 연상시켰지만, 회사에서 후배들에게 무섭기로 악명 높았다던 아빠가 (엄마나 언니나 나는 도무지 상상이 안 가지만) 올해부터는 부하직원들을 풀어주기 시작하셨다니, 찰떡같은 비유다. 뭐라 해야지만 잘하는 직원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풀어줬을 때 더 잘하는 직원들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셨다는 우리 아부지. 정년퇴직까지 3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 본인도 남들도 마음 편히 회사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으신 것 같다. 


2020년의 엄마는 돈 맛을 알게 되셨단다. 빈손으로 시작해 아빠의 외벌이만으로 살림을 꾸려왔던 엄마는 본인을 위해 돈 쓰는 법이 없으셨다.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 밥 한 끼 사 먹을 그 돈이면, 재료를 사다가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법이 수십 년 간 엄마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족 외식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돈이면 고기를 잔뜩 사다가 온 식구가 몇 끼는 단백질 보충을 할 수 있었으니까. 코로나로 인해 아빠의 월급이 줄어들자 올해 엄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많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엄마가 스스로 번 돈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언제부터인가 편의점에서 1+1 하는 젤리를 하나둘 씩 사 오시더니 집밥 대신 배달음식을 시켜 드시기도 하며 돈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된 엄마. 그런 엄마를 보는 우리도 덩달아 즐거워진 한 해였다. 


2020년의 언니는 행복한 나무늘보였달까. 5년 동안 크루즈 승무원으로 바다를 누비던 언니는 작년 여름에 육지에 정착하기로 결심했고, 경력을 살려 여행사에 취직했다. 새로운 직장에 다닌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언니는 코로나로 인해 수많은 여행업 종사자들처럼 무급휴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언니를 걱정해줬지만, 정작 언니는 쉼 없이 달렸던 20대를 지나 처음으로 주어진 쉼이 행복하기만 하단다. 한 달 후에 있을 결혼식을 보다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어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해에는 행복한 나무늘보를 넘어 행복한 새신부가 될 수 있기를.




가족이기에 당연히 다 안다고 생각하고 굳이 묻지 않았던 서로의 감정, 서로의 생각, 서로의 목표는, 그래서인지 남들보다도 더 모르고 있던 생소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아빠가 어떤 생각과 태도로 직원들을 대하는지,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엄마에게 얼마나 뜻깊은 일이었는지 알지 못했고, 언니가 회사 안 가서 좋다고 하는 말이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빈말인 줄만 알았지 진심인 줄은 몰랐던 거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더 많은 대화거리가 남아있을 것이고 그래서 다 함께 하는 저녁식사가 오래도록 지루해지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을 가져다준다. 어쨌든, 새해에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될 테니.


길었던 저녁식사를 마친 후, 온라인으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나니 어느덧 시계는 0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때가 되면 한동안 조용했던 카톡이 시끌벅적해진다. 귀여운 황소 그림과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소"라는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올해는 소띠 해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평소에 연락해보고 싶었지만 마땅한 용건이 없어 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새해 인사를 핑계로 안부를 묻고,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2020년의 마지막 일기를 쓴다. 내일부터는 '2021'이라는 어색한 숫자가 쓰인 일기장의 첫 장부터 차곡차곡 또 다른 한 해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게 될 것이다. 아마도 한동안은 '2021'이라는 숫자가 어색해서 매번 끝자리 '0'을 지웠다가 다시 '1'로 고치기를 반복할 것이고, 누군가가 나의 나이를 물어보면 "스물여섯, 아니, 스물일곱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쨌든, 또 다른 새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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