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Qu'ils mangent de la brioche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직역하면 "그럼 브리오슈를 먹으라고 해." 보통 상류층, 지배층, 또는 기득권 층이 일반 민중의 삶에 무지함을 비꼬는 데 사용하는 인용구이다. 빵이 없고 케이크가 있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제안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빵이 없는데 케이크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단지 남을 돕고자 하는 친절한 마음의 표시라 하더라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해당하는 빵이 없는 현실과 그런 현실을 알지도 못하는 계층의 존재를 인식함에 따라 깨닫는 불평등 때문에 이를 듣는 사람은 구조 그 자체로서는 가치중립적인 저 문장에 악의를 가득 담아 듣게 된다.
저 말을 처음 한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이다. 그녀는 1755년에 오스트리아 황실의 막내 공주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세자였던 루이 오귀스트 Louis-Auguste에게 시집왔고,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1793년, 38세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그녀의 죄목은 근친상간.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 Elisabeth de France와 함께 자신의 아들인 루이 17세를 겁탈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녀는 민중의 증오를 한 몸에 받은 왕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증오가 얼마나 심했으면, 어떤 이야기에서는 그녀의 개까지도 함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고 하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처형자가 바닥을 향해 엎드리는 통상적인 처형 방식과는 달리 그녀의 경우에는 칼날이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보도록 위를 향해 눕혀진 채로 처형이 집행되었다고도 한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그녀는 나라의 살림을 거덜내고 프랑스 왕실의 도덕성을 흠집 낸 사치스럽고 더러운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민중은 그녀를 적자 부인 Madame Deficit이라고 불렀고 그녀가 신하들과 불륜관계이며 귀족 부인들과는 동성애를 즐기고 있다는 포르노그라피가 간행되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동안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리고 더러운 짓거리를 일삼다가 고작 한다는 소리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였으니 민중의 분노와 증오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왕비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데, 그녀가 왕비로 있는 동안에 프랑스 왕실의 소비 수준은 사실 그렇게 높지 않았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선대 왕들과는 달리 품위 유지에 대한 개념도 없다는 구설수에 오를 정도로 검소했던 데다가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사치와는 오히려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왕실 예산은 법에 의해 국가 예산의 3%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 예산의 집행률은 고작 10% 남짓했다. 물론 사치와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왕비인 그녀가 일반 민중들만큼 검소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일반 민중들은 검소하기보다는 가난했으니까. 그리고 그녀 역시 왕비가 된 이후에는 도박, 연극, 무도회에 빠져서 밤늦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그래도 그녀가 왕비가 된 건 겨우 만 18세였고, 첫 딸인 마리 테레즈를 낳은 만 23세 때는 이미 그런 유흥과는 멀어져 있었다. 루이 16세가 그녀에게 선물해 준, 사치와 향락의 궁전으로 소문난 프티 트리아농 궁 Petit Trianon은 실제로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수수한 궁전이었다. 궁을 꾸미는 데 든 비용은 약 20만 리브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0억 원에 해당한다.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로부터 약 1백 년 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는 데 쏟아부은 돈이 당백전은 제외하고도 최소 원납전 760만 냥, 당시 조선 내 유통화폐의 70%가 넘었던 것에 비하면 사실 매우 적은 액수였다.
하지만 그녀가 이 궁을 꾸미는 데 얼마를 썼는지는 일반 민중들이 알 바 아니었다. 민중이 그녀에게 적자 부인이라는 별명을 붙이는 것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뇌물로 받은 것으로 알려진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가격은 2백만 리브르, 프티 트리아농 궁 개축비용의 무려 10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 사건은 목걸이를 제작한 보석상이 대금이 미지급되었다며 뇌물의 수수자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목걸이 대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뇌물을 상납한 로앙 추기경 Cardinal de Rohan은 이 사건의 진상을 가리기 위해 열린 재판에서 뇌물을 요구하는 왕비의 친필 편지를 증거로 제출했다. 추기경은 왕비와 친분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라 모트 백작부인 Jeanne of Valois-Saint-Remy을 통해 이 편지를 전달받았으며, 심지어 베르사유 궁에서 왕비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재판 결과 추기경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라 모트 백작부인은 왕비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저지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탈주하여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자신이 왕비의 사치와 뇌물 수수를 덮기 위한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민중은 그녀의 말을 믿었다.
사건의 진실은 당시 민중의 믿음과는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왕비는 라 모트 백작부인과 친분이 깊지 않았다. 로앙 추기경이 제출한 왕비의 친필 편지에는 'Marie Antoinette de France'라는 왕비의 서명이 있었는데, 이를 본 루이 16세는 'de France'라는 부분만 가지고도 이 편지가 조잡하게 조작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왕족은 서명할 때 성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추기경이 베르사유 궁에서 만났던 사람은 니콜 돌리바 Nicole Lequay d'Oliva라는 라 모트 백작부인에게 고용된 창녀로 밝혀졌다. 라 모트 백작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출세를 원하면 왕비가 원하는 목걸이를 선물하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추기경이 목걸이를 할부로 구매해서 백작부인에게 건넸고, 목걸이를 꿀꺽한 백작부인은 이를 해체하여 런던에서 낱개의 다이아몬드로 팔아 치웠다. 원래가 뇌물인지라 추기경이 배달사고 여부를 왕비에게 확인해 볼 수가 없었는데, 할부금 일부가 밀리자 보석상이 아예 왕비를 찾아가서 돈을 요구한 것이었다.
원래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최초로 주문한 사람은 선왕인 루이 15세였다. 그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바리 백작부인 Madame du Barry에게 이 목걸이를 선물할 생각이었지만 목걸이가 미처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떴다. 주문자가 세상을 뜨면서 계약도 공중에 뜬 와중에 추기경이 뇌물로 쓰려고 이 목걸이를 구입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이 당시 공개 재판에서 모두 밝혀졌음에도 민중은 이를 믿지 않았다. 그녀가 무고하든 말든, 사치스럽든 아니든, 민중에게 그녀는 싫은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었다. 그녀가 프랑스 왕비가 된 첫 번째 외국인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인에게 오스트리아는 그냥 싫은 수준을 넘어서는 나라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적대적 관계는 이미 300년도 더 넘게 지속되는 중이었다. 두 나라 사이가 얼마나 나빴으면 유럽 전역이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싸운 서유럽 최후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에서 프랑스는 골수 가톨릭 국가이면서도 오로지 오스트리아를 적대할 목적으로 신교 연합 편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실행한 사람은 심지어 가톨릭 사제인 리슐리외 추기경 Cardinal Richelieu이었다. 그 후 10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두 나라 사이의 적대감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오스트리아의 공주가 프랑스의 왕비로 온 것이다. 물론 30년 전쟁 당시 프랑스가 종교적 신념보다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서 오스트리아를 적대했던 것처럼, 이런 갑작스러운 결혼 동맹 역시 적대적 감정보다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진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6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 뒤를 이었는데, 프로이센은 살리카 법에 따라 여자에게는 계승권이 없음을 주장하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약 8년에 걸쳐 양국 간에 이른바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을 통해 마리아 테레지아 대신 그녀의 남편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인정받았으나 대신 알짜 영토인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내줘야 했다. 신흥강국인 프로이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동맹인 영국보다 대륙에 붙어 있는 프랑스가 더 낫다고 판단한 오스트리아는 지금의 벨기에 지역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주는 대가로 군사동맹을 체결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 동맹을 강화할 목적으로 황태자인 요제프를 시작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다섯 명의 자녀를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혼인시켰다.
민중에게 정치적 이해관계 따위는 알 바 아니었고, 그들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오스트리아 사람이 왕비랍시고 들어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년 L'Autrichienne이라고 불렀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오스트리아 여자이지만, 단어의 뒷부분인 chienne는 프랑스어로 암캐 또는 여성에 대한 비칭이어서 특별히 그 부분을 강하게 발음했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 초기에는 루이 16세조차 그녀와 그리 가깝지 않았다고도 한다. 시조부가 되는 루이 15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귀여워했다고 하나 루이 15세가 사망할 때까지도 증손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왕비가 파티에 빠져서 후계자 생산에 게으르다고 비난했다. 루이 16세가 애인을 따로 두지 않는 것조차도 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하는 이유가 되었다. 외국 공주 출신이면 궁에서 가만히 아이나 낳고 지내는 것이 마땅한 데도 남편을 쥐어 잡고 살면서 애인도 못 두게 하는 성격 드센 여자라는 것이었다. 왕비는 외국인이지만 왕의 애인은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실제로 왕의 애인이 단순히 애인 노릇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여공작 Marquise de Pompadour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의 애인이 사람들이 사랑을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왕의 애인이라는 자리는 비도덕적이었고 왕의 애인이라는 여자는 사치스러웠다. 왕의 애인이 있을 때 쏟아지던 불만과 분노, 비난이 왕의 애인이 없어지자 왕비에게 쏟아진 것뿐이었다. 이전에 왕의 정부를 비난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왕비를 비난했다. 정부의 비도덕적이고 사치스러운 이미지는 불륜과 동성애를 저지르는 왕비의 포르노그라피로 재생산되었다.
정작 마리 앙투아네트는 상냥한 왕비였다고 한다. 물론 그녀가 모든 사람에게 상냥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등장하는 로앙 추기경이나 바리 백작부인은 그녀가 싫어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로앙 추기경의 경우에는 그가 주 오스트리아 프랑스 대사로 부임한 동안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험담을 했기 때문에 싫어했다. 바리 백작부인의 경우에는 그녀가 왕의 애인이라는 것 자체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경멸의 이유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오스트리아는 여성의 정숙함을 강조해다 못해 여성이 술집이나 여관에 취직하는 것도 금지하고 여성의 야간 통행도 금지했으며 이를 어기는 여성은 삭발하는 처벌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루드 여공작을 경멸했듯이 마리 앙투아네트도 바리 백작부인을 경멸했다. 퐁파루드 여공작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도 경멸했을 것이다.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가 사망한 이후 왕비가 없었던 프랑스 왕실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인은 세자빈인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바리 백작부인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지체가 낮은 사람은 먼저 말을 걸 수 없었으므로 바리 백작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이는 나중에 루이 15세가 오스트리아에 항의하는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번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편지를 써서 바리 백작부인에게 예를 표시하라고 달래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첫인사로 겨우 건넸다는 말이 '오늘 베르사유에 사람이 참 많군요 il y a bien du monde a Versailles aujourd'hui'라고 전해진다. 이것이 앞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그녀가 무관하다는 정황 증거 중 하나인데, 그녀가 로앙 추기경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거나 바리 백작부인을 주려고 제작한 목걸이를 탐냈다는 것이 그녀의 평소 행동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그녀가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상냥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특히 민중에게 상냥했다. 루이 16세가 사냥을 하다가 다치게 한 농민을 직접 치료해 주었다든지 농민들의 밭을 망치는 게 싫어서 사냥이나 승마를 즐기지 않았다는 일화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큰 딸이었던 마리 테레즈를 데리고 빈민가를 방문하거나 빈민가의 아이들을 궁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조르는 마리 테레즈에게 밖에 수많은 굶주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궁에 초대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다가 정작 마리 테레즈의 신년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적도 있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마리 테레즈에게도 자신의 장난감을 선물하도록 하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엄격한 자녀교육은 자신이 받았던 가정교육에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처음 프랑스 왕실로 시집왔을 당시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루이 15세의 딸들을 반면교사로 삼은 것도 있다. 루이 15세는 딸바보였고, 장녀를 정략결혼으로 시집보내고 차녀와 삼녀가 일찍 죽은 이후에는 남은 딸들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줬다고 한다. 심지어 장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시집가지 않아서 왕이 다 큰 딸들을 끼고 산다는 구설수가 돌 정도였다. 딸바보인 건 루이 16세도 마찬가지여서 어린 마리 테레즈는 엄격한 어머니보다 항상 오냐오냐 했던 루이 16세에게 더 많이 애착을 드러냈다고 한다.
단순히 상냥함을 넘어서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빈민 구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7년 전쟁 당시 프로이센 군에 포로로 잡힌 후 포로수용소에서 감자를 재배해 먹었던 파르망티에 Antoine-Augustin Parmentier는 감자가 당시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감자를 악마의 작물이라고 부르며 기피하고 있었고 심지어 감자를 먹으면 문둥병에 걸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루이 16세는 파르망티에에게 50 에이커 정도의 경작지를 내 주어 감자를 재배하도록 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자에 흰 감자꽃을 꽂고 무도회에 나오는 등 감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전환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패션은 유럽의 왕실과 상류층 여인들에게 큰 관심거리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따라 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푸프 스타일이나 18세기 상류층 여인의 복장으로 자리 잡는 무슬린 드레스를 처음 유행시킨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한다.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아서 베르사유 궁전의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단장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프티 트리아농 궁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가장 자연스러운 정원이라는 평을 받는다. 오스트리아 출신답게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고 특히 하프 연주를 좋아했다. 신동으로 유명하던 6세의 모차르트가 비엔나 궁정 음악회에 왔다가 넘어졌을 때 자기를 일으켜 준 공주에게 즉석에게 청혼해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는데, 그 일화의 공주가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는 7세였다.
남편을 휘어잡고 사는 드센 여자라는 이미지 역시 상당히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이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프랑스 왕실 자체가 외국 공주 출신인 왕비가 정치에 간섭하도록 내버려 두는 곳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프란츠 1세가 급서한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어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공동 통치하고 있던 오빠 요제프 2세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통해 프랑스 내의 영향력을 확대해 보려고 했지만 그녀가 오빠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없다. 그녀가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후였다. 본인은 아마도 정치에 관여한다기보다는 왕실의 가정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하여 스스로 무장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영주와 귀족들을 살해하고 토지대장을 불태웠는데, 귀족들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모두 죽일 거라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돌았다. 농민들은 동요했고 이 과정에서 파리에 식량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빵값이 폭등하자 이 문제가 베르사유에 있는 왕실이 파리의 식량사정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하층계급의 부녀자들 7천여 명이 앞장서고 남자들이 그 뒤를 따른 채 베르사유 궁으로 행진하여 루이 16세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다. 루이 16세는 귀환을 약속했지만, 왕비가 귀환하지 않도록 왕을 구슬릴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시위대는 밤새 궁을 포위했다가 아침에 궁에 난입해서 왕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루이 16세는 발코니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파리 귀환을 약속했고, 왕실은 10월 6일 군중에 둘러싸인 채로 파리의 튈르리 궁 Palais des Tuileries으로 거쳐를 옮겼다. 사실상 유폐되어 감시 하에 놓였지만 아직도 루이 16세는 왕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였다.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폐지했지만 군주제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국민의회의 의장이었던 미라보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태가 더 악화되지 않고 진정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1791년 4월 미라보가 급사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왕권에 대한 불만과 혁명정부에 대한 루이 16세의 불신에 겹쳐서 부활절 미사를 드리기 위한 튈르리 출궁조차 군중에 의해 저지되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외 탈출을 계획했다. 1791년 6월 20일 밤 10시 반, 왕실은 튈르리 궁을 탈출하여 오스트리아 국경지대로 향했다. 계획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국경지대에 있는 친왕 세력의 군대와 합류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이 사건이 발생하자 왕실에 대해 남아있는 일부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인 여론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오스트리아는 조국이자 친정이지만 민중에게는 여전히 적국이었고 이 사건은 적국 출신 왕비가 드디어 왕과 왕자와 공주들을 데리고 적국으로 망명해서 적국의 군대를 이끌고 자신들을 공격하러 돌아오려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탈출은 왕실의 국외 망명이라는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허술하게 진행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과 왕비의 품위에 어울리도록 12마리의 말이 끄는 커다랗고 호화로운 마차를 탔다. 수행하는 마차도 여러 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이 어느 정도 순조로웠던 것은 왕과 왕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민중 가운데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그들이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다하고 말았다. 바렌 Varennes 의 우체국장인 드루웨 Jean-Baptiste Drouet 가 화폐에 새겨진 왕의 얼굴을 보고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챈 것이다. 탈출 행렬은 21일 밤에 바렌에서 발이 묶였고 22일 아침에 탈출 시도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파리로 끌려 온 루이 16세는 바렌 도주가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왕실이 납치되었던 것이라고 변명하였고 국민의회는 일단 3개월 왕권 정지 정도로 이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루이 16세는 9월 14일에 1791년 헌법에 선서함으로써 입헌군주국의 국왕 - 국가를 대표하는 세습제 종신 관료 - 으로 복권되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치적 영향력은, 만약 그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바렌 도주가 실패했을 때 완전히 사라졌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792년 4월, 프랑스혁명의 전파를 우려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국민군을 소집하여 맞섰지만 연전연패했다. 잇따른 패배가 누군가 적군에 군사기밀을 누설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누군가란 오랜 적국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와 그 남편인 왕이었다. 바렌 도주 사건으로부터 1년이 되는 6월 20일, 루이 16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다시 튈르리 궁에 난입했다가 물러갔다. 그러나 연합군 7만이 파리에 접근하자 시민들이 다시 동요했다. 8월 9일에는 급진적인 혁명가들이 파리를 장악하고 파리 코뮌의 성립을 선언했다. 파리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국민군 사령관이 살해되었고 시민들이 다시 튈르리 궁으로 몰려갔다. 왕실을 지키는 근위대는 모두 도주했다. 해산하여 탈출하라는 루이 16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 786명이 전멸했다. 그 사이 가까스로 튈르리 궁을 탈출한 왕실은 입법의회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의회로 몰려가자 의회는 왕가의 신변보호를 포기했다. 8월 10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왕실 일원은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프랑스군이 발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파하며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이 왕실의 운명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9월 20일,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다시 국민공회가 수립되었다. 다음 날,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의 성립을 선언했다. 루이 16세는 폐위되었고 곧 혁명전쟁 중 정부와 국민을 배신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다음 해 1월 14일에 열린 루이 16세의 반역 혐의에 대한 재판의 투표 결과는 사형 361표, 집행유예 26표, 무죄 334표였다. 18일에는 사형을 집행할지를 놓고 재투표가 있었다. 380명이 찬성했고 310명이 반대했다. 그리고 21일, 콩코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의 처형이 집행되었다.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1793년 8월 1일 그녀는 콩시에르주리 감옥 Conciergerie으로 이송되었고 10월 14일에는 다음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치스러운 파티를 한 죄
오스트리아에 수백만 리브르를 유출한 죄
아들을 프랑스의 왕으로 선언한 죄
1792년의 학살을 교사한 죄
아들과 근친상간한 죄
그녀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시간으로 단 하루가 주어졌다. 대부분의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유죄가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인 루이 17세가 근친상간의 혐의를 시인하는 증언을 하였고 해당 죄목에 대하여 유죄가 인정되었다. 선고 결과는 사형이었다.
당시 8세였던 루이 17세는 앙투안 시몬이라는 구두 수선공에게 맡겨져 있었는데 심하게 학대받고 약물치료를 이유로 마약을 투여받는 등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고 한다. 근친상간에 대해 변론하라는 요구를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변론을 거부했다.
Si je n’ai pas répondu c’est que la nature elle-même refuse de répondre à une telle accusation faite à une mère. J’en appelle à toutes celles qui peuvent se trouver ici!
어머니에 대한 그런 기소에 답변하는 것은 자연이 허락지 않으므로 나는 답변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곳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깨닫기를 호소합니다!
이틀 후, 그녀는 콩코드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되던 날 그녀는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녀는 국외로 탈출하지 않고 함께 남아있다가 체포된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C'est à vous, ma sœur, que j'écris pour la dernière fois ; je viens d'être condamnée non pas à une mort honteuse, elle ne l'est que pour les criminels, mais à aller rejoindre votre frère. Comme lui innocente, j'espère montrer la même fermeté que lui dans ces derniers moments. Je suis calme comme on l'est quand la conscience ne reproche rien ; j'ai un profond regret d'abandonner mes pauvres enfants ; vous savez que je n'existais que pour eux, et vous, ma bonne et tendre sœur, vous qui avez par votre amitié tout sacrifié pour être avec nous, dans quelle position je vous laisse! J'ai appris par le plaidoyer même du procès que ma fille était séparée de vous. Hélas! la pauvre enfant, je n'ose pas lui écrire, elle ne recevrait pas ma lettre, je ne sais même pas si celle-ci vous parviendra, recevez pour eux deux ici ma bénédiction. J'espère qu'un jour, lorsqu'ils seront plus grands, ils pourront se réunir avec vous, et jouir en entier de vos tendres soins.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방금 선고를 받았어요. 하지만 그건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치욕적인 죽음이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만날 수 있는 선고입니다. 결백했던 그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마지막 순간에 의연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다만 불쌍한 내 아이들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군요. 알다시피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살아왔으니까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우리 곁에 남았던 당신 - 내 착하고 다정한 자매에게서도 떠나야 하는군요. 재판 과정에서야 겨우 딸아이가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불쌍한 것! 그 아이에게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아마 쓰더라도 받을 수 없겠지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도착할지도 알 수 없지만 이 편지에 아이들에 대한 축복을 담아 보냅니다. 언젠가 그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당신을 만나 그 착하고 다정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녀의 어린아이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도 함께 남겼다.
"Qu'ils pensent tout deux à ce que je n'ai cessé de leur inspirer : que les principes et l'exécution de leurs devoirs sont la première base de la vie ; que leur amitié et leur confiance mutuelle en feront le bonheur ; qu'ils sentent enfin tous deux que, dans quelque position où ils pourront se trouver, ils ne seront vraiment heureux que par leur union, qu'ils prennent exemple de nous : combien dans nos malheurs, notre amitié nous a donné de consolations, et dans le bonheur on jouit doublement quand on peut le partager avec un ami ; et où en trouver de plus tendre, de plus cher que dans sa propre famille. Que mon fils n'oublie jamais les derniers mots de son père que je lui répète expressément : qu'il ne cherche jamais à venger notre nom.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삶의 원칙이라는 것을, 서로 우애를 나누고 믿으면 행복해 지리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닮았으면 좋겠네요. 그 불운한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우정이 얼마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은 친구와 나누면 배가 되고 가족만큼 진실한 친구를 어디에서 또 구할 수 있겠어요. 우리 아들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를 대신해 복수하려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Je pardonne à tous mes ennemis le mal qu'ils m'ont fait. Je dis ici adieu (à mes tantes et) et à tous mes frères et sœurs. Mon Dieu ayez pitié de moi! Mes yeux n'ont plus de larmes pour pleurer pour vous mes pauvres enfants. Adieu, Adieu!
나는 나의 적들이 나에게 한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이제 (고모들과) 형제자매들에게 작별을 고해야겠습니다. 신께서 내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더 이상 당신과 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흘릴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안녕, 안녕히!"
그녀의 편지는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마담 엘리자베트는 반년 후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유죄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아들인 루이 17세는 2년 후 임파선 결핵으로 사망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마리 테레즈는 3년 후 오스트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녀는 그때서야 어머니와 고모가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평생토록 프랑스 민중은 물론이고 어머니를 죽음에 몰아넣은 증언을 한 동생도 용서하지 않았다.
편지를 쓴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를 깎이고 거름통을 싣는 마차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단두대를 올라가면서 그녀는 실수로 집행관의 발을 밟았다.
"Monsieur, je vous demande pardon. Je ne l'ai pas fait exprès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녀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원래 프랑스로 시집오기로 했던 것은 그녀의 바로 윗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Karolina 였다. 그러나 나폴리로 시집가기로 했던 아홉 번째 언니인 마리아 요세파 Maria Josepha 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마리아 카롤리나가 나폴리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게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특별히 친했던 마리아 카롤리나는 동생이 처형당한 후 평생 프랑스인을 증오했고 나폴리 궁중에서의 프랑스어 사용도 금지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전에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근친상간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사치스럽고 음란한 왕비로 기억되었다. 그녀를 위해, 잘못 알려진 사실 중 단 한 가지만 바로 잡고자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라고 말한 적이 없다. 혁명정부는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소문을 퍼뜨렸고, 이를 믿은 민중들이 바렌에서 붙잡은 마차를 파리로 압송하면서 '빵집 주인과 마누라, 그 애새끼를 호송한다'라고 조롱했다.
원래 저 말이 등장하는 곳은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의 저서 참회록 Les Confessions이다.
옛날에 어느 공주가 빵이 없다는 농부들에게 브리오슈를 먹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공주가 알고 있는 빵의 이름은 브리오슈뿐이었고, 이것은 자기가 먹을 빵을 굶주리는 사람에게 주려는 호의에서 나온 말이었다.
루소가 이 책을 완성한 것은 1770년이다. 그리고 그 해에 열네 살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가 프랑스로 시집왔다. 그때부터 그녀의 이름은 프랑스 식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