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안아줄까요?
도대체 연애가 뭐니? 재란이 물었을때 세현은 지금 우리가 하는게 연애라고 대답했다.
재란이 "설마? 이런 게 연애라고? 별 게 없구나 " 하며 눈썹을 치켜 올리자 세현의 마음에는 또다시 긁힌 자국이 났다. 이런 흉터가 수십개는 되는 것 같다. 나는 사랑인데 쟤는 자꾸 우정이라고 그런다. 사랑과 우정이 크게는 비슷한 감정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나는 사랑, 상대는 우정인데도 어찌 어찌 관계가 이어져나간다. 어쩔 땐 궁금하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래서 재란에게 물어봤다. 술에 취한 날이라거나 재란의 침대에서 쫓기듯 나와야 할 때.
"너는 친구랑 키스하고 친구랑 같이 자냐?"
그럼 재란은 천연덕스럽게 응수한다.
"싫어?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느 키스 안하고 같이 안 자도 너랑 친구할꺼야."
원래 친구사이가 그런 거야, 라고 화를 낼 뻔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놓을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고. 힘들면 관두라는데 복잡한 관계도 시간이 오래되니 거기에 익숙해진다. 지금 세현은 재란의 옆에서 편안하게 기웃댄다. 진짜다. 편안하다. 재란은 세현에게만 자기 방문을 열어준다.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세현은 이대로 쭉 지내도 좋다. 재란의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재란이 자신을 필요한 순간을 노리면서.
똑똑, 재란아. 힘들어? 힘들면 안아줄까?
박세현
179cm. 마른 몸. 살짝 처진 눈. 단정한 생김새. 나이가 들어도 소년티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외모다. 19세에 친구인 한이재와 한 아이돌 그룹 멤버로 데뷔. 2년 활동하고 아이돌 생활을 접었다. 영 적성이 아니라는 걸 꺠달았다. 회사와 남은 계약 기간은 곡을 쓰고 노래를 프로듀싱하는 작업으로 채웠다. 그 사이 괜찮은 대학 음대에 진학해 졸업도 했다. 회사 대표인 이태광의 추천으로 여러 상업음악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작업한다. 그러다 개인앨범- 주로 연주곡과 발라드 위주-을 내고 가수로 활동한다. 인기절정의 연예인은 아니다. 세현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음악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어서 운이 좋은 사람일뿐이다. 그러나 연예계에서 그는 꽤 유명하다. 아이돌이었던 이력과 그리고 친구 한이재가 인기최절정의 탑배우이기 때문이다. 둘은 거의 형제처럼 지내는데 너무 붙어지내서 찌라시에는 둘 사이가 심상치 않고 사실은 커플이라는 소문까지 나 있다.
사람 좋고 다정하고 친절하고 센스가 좋다. 좋은 부모님, 늘 편이 되어주는 이재와 영교(사촌), 잘생긴 외모, 음악적 재능. 그는 어디 하나 이그러진 곳이 없다. 부족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세현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결핍이 없는 세현을 하찮게 본다. 너는 진정한 인생을 모른다거나, 네가 겪는 아픔은 별게 아니라거나.
"네가 뭘 알겠어? 인생의 쓴 맛을 본 사람만이 진정한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거야."
냉온수가 잘 섞여 마시기 적당한 온도의 물처럼 내 인생은 그렇게 밍밍하게 흘러갈거라고, 세현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재란을 만났다. 다가왔다. 사라지고 또 나타나고 사라지는 여자애. 뭐 하나 쉬운게 없는 여자애. 수수께끼같은 재란을 만나고 나서 세현의 인생이 불규칙적인 바운스로 널뛰기 시작한다.
이재란
167cm. 흰 피부, 검은 머리카락, 선명한 붉은 입술, 웃을때 살짝 올라가는 눈꼬리가 매력적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예뻤다. 탄력있는 가슴, 가느다란 허리, 둥근 엉덩이가 미모와 더해지면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재란에게는 불행일수도 있는 미모다.
출생부터 꼬여서 사는 내내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선림그룹 막내딸이 스무살에 사고쳐서 낳은 게 재란이다. 낳았으면 잘 키워줄 것이지 스무살 엄마는 스물 두살 댄스 가수 지망생이었던 아빠와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어린 것들의 사랑놀음에 남은 사람들만 개고생했다. 그 중 재란이 제일 고생했다.
선림그룹은 재란을 모른척 했고 재란은 큰아버지 호적에 입적되어 무서운 친할머니가 키워줬다. 그냥 그렇게 살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재란이 일곱살 되던 해, 유치원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집 앞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서 회색 양장을 잘 차려입은 할머니 한 명이 내렸다. 재란의 외할머니였다. 선림그룹 회장 사모님. 그녀는 아깝게 잃은 자신의 막내딸을 그리워하다 재란에게 온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재란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며 먼저 떠난 막내딸의 흔적을 찾았다. 그 다음날부터 재란은 외갓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갓집에서의 생활은 유리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외할아버지는 무섭고 외할머니는 깐깐했다. 밤마다 울었다. 무섭기만 하던 친할머니가 보고 싶고 큰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졌다. 이대로 쭉 살았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5학년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재란의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재란은 자랄수록 아빠를 닮아갔다. 외할머니는 그런 재란을 못견뎌했다. 재란의 얼굴에서 그 죽일놈의 한량자식 흔적이 보이면 외할머니가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러다 결국 할머니는 재란을 보고 소리질렀다.
"넌 그 애가 어니야! 넌 내 딸이 아니라고! 당장 나가!"
그 다음날 재란은 다시 친할머니 집으로 옮겨졌다. 비워져 있는 친할머니의 자리가 아프게 느껴졌다. 재란이 돌아오자 큰아버지는 말없이 안아주었다. 물론 재란이 뿌리쳤지만.
그때쯤 만난 아이가 세현이다. 처음엔 피아노를 잘 쳐서 관심을 가졌고 자꾸 눈길이 갔다. 웃는 모습에 그늘 하나 없는 게 마음에 들었다. 행복해보여서? 잘생겨서? 뭐가 됐든 세현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현은 재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다. 세현과 친구를 계속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가족이 되거나 연인이 되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재란에게 가족은 속박일뿐이고 연인은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관계일뿐이다.
사실 자신은 사랑이 뭔지 연애가 뭔지 잘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늘 재란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래놓고 버렸다. 그래놓고 자기 마음대로 다시 데려갔다. 그래놓고 할머니 마음대로 쥐고 흔들려고 한다. 재란은 그런 사랑에 지쳐있다. 세현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다. 세현은 다르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재란은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재란이 하는 사랑이 외할머니의 것과 같을까봐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