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안아줄까요? 1

by 브리

# 1


“내 첫사랑은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에요. 단발머리에 흰 스웨터가 잘 어울리는 엄격한 분이셨어요. 다른 애들이 놀이터에서 놀 때 나는 학원에 가야 했는데 선생님은 과자 한 봉지를 피아노 위에 올려 놓으셨어요. 그리고 숙제를 다 할때까지 그 과자를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죠.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며. 숙제를 끝내고 먹는 그 과자는 아주 고소하고 달콤했어요 나는 그게 좋았어요. ”

-<더 인터뷰, 피아노와 무대를 누비는 여행자 박세현 중에서 발췌>



재란은 붉은 와인이 든 잔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자신의 손톱을 봤다. 세 시간 전 네일샵에서 매끄럽게 다듬어 준 손톱에는 핑크색 젤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다. 소개팅을 빙자한 선자리에 나오기 전에 네일샵에 들른 건 할머니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손톱은 깨끗하게 정리하고 구두도 얼룩 하나 없이 말끔해야 해. 그리고 머리카락이 매끄럽고 단정해야 품위 있어 보이는 거야. 물어뜯어서 엉망이 된 손톱을 하고 있으면 아무리 차려입어도 태가 안 나.”


어렸을 때 손톱을 씹는 버릇이 있던 재란을 나무라며 할머니는 앵무새처럼 이 말을 반복했다. 목소리를 높이는 법 없이 엄격한 눈빛만으로 할머니는 재란의 손톱을 지켜냈고 그 다음은 구두를 관리하게 만들었으며 아무리 피곤해도 머리카락에 트리트먼트 하는 것을 잊지 않게 했다. 몇 년을 걸쳐 몸에 배인 습관은 이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재란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손톱을 보았다. 남성적인 손가락 끝에 둥근 손톱이 단정하다. 이 남자도 꽤나 잔소리를 들었나보다.


“재란씨는 최근에 뉴욕에서 지냈다면서요. 뉴욕 좋아해요?”


직업이 검사라는 남자는 둥그스름한 안경을 쓰고 있어 얼굴이 순해보였다. 사법고시를 통과하느라 공부만 열심히 했는지 피부가 흰 편이었고 회색 셔츠와 남색 넥타이가 잘 어울렸다. 그러나 재란의 눈에 그는 밋밋했고 평범했다. 모범생이었다가 고시생이었다가 이제는 검사로 무난하게 잘 살 사람이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와이프의 시중을 받으며 밥을 먹고. 아마 아이는 두명 정도? 주말에는 골프를 치고? 같이 안 살아봐도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그런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낼 사람이다.


“네. 좋아해요. 거기에 있으면 여러 가지 자극이 많이 되죠. 놀고 먹기엔 그만한 데가 없어요.”

재란은 웃으며 대답했다. 남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재란의 미소가 너무 예뻤기 떄문이다. 눈 앞에 있는 이 여자는 정말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가 한 번도 제 것이 될거라고 꿈꿔본 적 없던 그런 종류의 여자다. 검사가 되자마자 마담뚜들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그는 좀 우쭐해져 있었다. 긴 시간 고생했으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좀 즐겨야지, 생각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단한 집 딸들을 만날 기회가 알아서 굴러 들어왔기에 그 중 몇 개 나가서 자신의 위치를 만끽하려 했다. 나오기 전에 재란의 사진을 보긴 했지만 포토샵으로 수정한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사진은 실물을 담지 못했다. 재란은 훨씬 더 아름다웠던 것이다. 커다랗고 둥근 눈, 반듯하게 높은 코는 단정했고 위 아래 적당히 도톰한 입술은 도발적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넘실거리는 어깨는 우아한 골격을 드러냈고 쭉 뻗은 팔 다리가 시원했다. 재란이 가느다란 은사로 엮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은 남자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했다. 그는 목이 타는 것 같아 급하게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지금은 한국에 완전 들어온 겁니까? 댁이 대산동이라고 들었는데.”

“임시로 거기에 자리잡았어요. ”

“아. 임시요? 그럼 다시 뉴욕으로 가시나요?”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전해 듣기로 표면상으로는 조소 작가라지만 있는 집 딸들이 그렇듯 그냥 이름만 걸어놓은 거라고 했다. 전시회를 열어도 진짜 실력이 있어서라기 보다 대외적으로 내세울 이력이 필요하니까. 옛날로 치자면 신부수업이라고 쳐도 무방한 그 정도인줄 알았는데 뉴욕에 뭐가 있길래 한국은 임시라고 말하는 걸까? 남자의 생각을 알아차린 재란이 눈웃음를 지었다.

“다시 가야죠. 거기가 편해요. ”


재란은 돌려서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중이었다. 사실 재란은 한국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할머니 신여사만 아니라면 한국은 친구인 영교를 만나러만 가끔 오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재란에게는 거주의 자유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에 살지는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혼만큼은 자유의지를 꺽지 않을테다. 결혼이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결정 중 제일 큰 것 인만큼 무조건 사수할 생각이다. 안 그러면 재란의 인생이 너무 불쌍했다.


남자는 눈만 깜뻑거리며 재란을 멍하니 바라봤다. 공부 잘하는 것과 눈치 있는 건 다르다더니 이 남자는 머리가 공부 쪽으로만 갔나보다. 재란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점에서 부탁드릴게요. 댁에 돌아가시면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해주세요. 정대성씨도 결혼 생각 없으시죠? 저도 그래요. 전 미국에 돌아가서 돈이나 쓰면서 살고 싶어요.”

안녕 너머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화를 내거나 태연한 척 군다. 어느 쪽이든 자존심이 상했다는 표시다. 이 남자는 색다르게 놀라는 중이다. 확실히 순한 남자가 맞다. 지금까지 선 봤던 남자 세 명 중에 이 남자가 제일 괜찮았다. 순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첫 번째 남자는 오만했고 두 번째 남자는 방탕했다. 그리고 두 남자 다 뒤끝이 길었다. 그들은 거절 의사를 확실히 밝혔음에도 전화하고 찾아오고 화를 냈다. 그걸 알고 승호가 길길이 날뛰며 손을 봐주겠다고 했지만 재란은 심드렁했다. 뭐, 못 견딜 정도는 아니고 저러다가 말겠지 싶었다. 다른 사람 굳이 상처줘서 뭐할려고.


“그런데 전 재란씨 마, 마음에 드는데요?”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재란은 좋게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몸을 테이블 쪽으로 가져갔다.

“저기, 정대성씨.”


재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공기를 타고 흘렀다. 어딘지 애정이 깃든, 따뜻한 느낌이었다.


“나랑 결혼한다고 해서 신호그룹 사위가 되지 못해요. 나는 그쪽 집안에선 객식구에요. 옛날로 치자면 출신성분이 나쁜, 홍길동 같은 존재라구요. 내가 신호그룹 쪽 사람들이랑 만나는 일도 거의 없어요. 내가 불쌍하니까 선대회장 사모님이 신경을 좀 쓰는 정도에요. 지금 그 분은 나이가 80세가 넘어서 오늘 내일 하세요. 그 분 돌아가시고 나면 저랑 신호그룹이랑은 완전 끝이에요. 끝.”

“그렇지만...”


남자가 끼어들었지만 재란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중간에 소개해준 사람은 제 조건이 엄청 좋다고 했겠지만 실상은 이래요. 지금 정대성씨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되기 일보직전이에요. 정대성 씨 부모님이 이런 조건들을 다 알면 속상하실껄요? 귀하게 키운 아들이 이런 결혼을 하는 거 싫으실텐데요. 고아에, 친정 식구 한 명도 없는, 뉴욕에서 놀고 먹는 며느리..... ”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재란은 바닥에 조금 남은 와인을 마저 마셨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투명한 와인 잔을 감싸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남자는 촉촉이 젖은 재란의 입술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전 괜찮은데요. 그런 거.”

이 남자도 힘드네. 재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이란 무릇 결혼하기 싫은 미혼 남녀가 집안의 강요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거 아니었나? 아니 재란의 조건에 되게 혹할 정도로 못하는 집 남자도 아닌 거 같은데 왜 이러는 건지. 재란은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열고 기사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 화면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받았다. 재란은 읽어보라며 해드폰 화면을 가리켰다.

재란이 검색한 기사는 증권가 찌라시를 모아 작성한 것으로 기사 속 등장인물은 알파벳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거기 두 번째 기사 D양이 저에요.”

남자가 검지로 기사를 쭉 내렸다.

충격! 뉴욕밀월여행?

자신의 전 곡을 작곡하기로 유명한 아이돌 출신 싱어송라이터 C군은 매년 크리스마스만 되면 뉴욕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가 만나러 가는 사람은 재벌가 D양. C군은 뉴욕에 살고 있는 D양과 오래동안 사귀고 있는 사이며 이는 연예계에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고 한다. C군의 팬들은 D양의 존재를 알고 D사 제품 불매운동을 벌리기도 했다고.

남자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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