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스케줄이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우린 모두 다 프리랜서라서 시간이 곧 돈인데 여유 부리면 안돼. 연말을 조용히 보내니까 좋다. 진짜야. 정말 좋아. 그런데 네가 연주하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는 듣고 싶어”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재란이 세현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세현은 긴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톡톡 치며 박자를 세었다. 이건 음악에 빠져있을 때 무의식 중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세현의 별명은 메크로놈이었다. 유튜브에는 세현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고 있는 영상이 수없이 많았다. 물론 피아노 치는 영상은 그보다 수천 배는 더 많았고. 세현의 가장 최근 영상은 엊그제 세종문화회관에서 선 보인 <무(舞) ; 율(律)>무대다. 현대음악과 전통무용의 콜라보를 통해 아름다움의 극치를 주제로 삼았던 공연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관심을 끌기 위해 공연 실황을 짧게 찍어 올렸는데 세현이 맡은 ‘제 3장 어우러지다’ 영상이 제일 조회수가 높았다. 영상 속에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세현은 검은 깨끼로 지어진 두루마리를 입고서 천천히 당산포 타령을 연주했다.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소매자락이 세현의 연주를 따라 너울거리면 그 움직임을 이어받은 여자 무용수가 피아노 소리에 중독된 것처럼 춤을 췄다. 여자의 춤은 흐느끼는 듯 했고 세현의 연주는 묘하게 유혹적이었다. 이 영상에 달린 댓글 대부분은 세현의 매끈한 목덜미와 반듯한 옆 모습에 관한 칭송이었다. 평소 유순하게 보이는 세현이 날카롭고 예민해보인다며, 연출자가 제대로 감잡았다는 칭찬도 한가득이었다.
공연날 한 톨 흐트러짐도 없이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오늘은 잔뜩 헝크러져 이마를 덮고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곡이 마음에 드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자 이동주 실장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어때?”
“괜찮네.”
현재, 회사에서 새로 준비하는 신인 남자 아이돌 그룹을 위한 타이틀 곡 경합이 한창이었다. 세현은 이동주 실장의 SOS를 받고 회사에 들렀다. 세현이 열일곱이던 시절부터 함께한 동주는 매니저에서 이제 A파트 총괄실장이 되어 회사 안 중요 결정권자중 한사람이 되어 있었다. 동주가 맡은 A파트는 두 개의 아이돌 팀을 맡고 있었고 이번에 새로 한 그룹 더 런칭 예정이다. 셋을 맡기엔 너무 많지 않냐며 동주는 툴툴거렸지만 이태광 대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 팀 더 한다고 뭐 어려워?”
세현이 몸담은 ‘아이오’는 아이돌을 주력으로 키워내는 엔터 회사였다. 세현은 열일곱에 아이돌 연습생으로 들어와 스물 한 살 까지 짧은 아이돌 생활을 한 뒤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진로를 틀었다. 그는 남은 계약 기간을 작곡과 프로듀싱으로 채웠다. 그리 경쟁이 높지 않는 음대에 진학해 학업을 마치고 회사 내 아이돌팀을 서포팅하다 이태광 대표의 제안으로 영화 음악 쪽으로 분야를 넓혔고 적당한 때에 틈틈이 써 놓았던 곡을 모아 개인 음반을 발매했다. 세현이 26살이 되던 해였다. 그의 앨범 <murky>는 밤 바다 같은 감정 속으로 자맥질 해 들어가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린 것으로 크게 히트를 쳤다. 이 앨범을 들은 사람들은 세현이 지독한 사랑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세현의 담담한 목소리와 절제된 연주, 때로는 애원하고 때로는 화를 내는 듯한 노래가사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만했다. 인터뷰 할때마다 질문을 받았지만, 세현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건 일종의 전략이었다. 그 덕인지 군대를 가기 전 <murky>의 연작으로 <vague>를 냈는데 이 앨범이 그 대답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피아노 연주곡으로 채워진 이 앨범은 팬들이 ‘밀당’이라는 애칭으로 부를만큼 사람 마음을 흔들었고 또 대박을 쳤다.
세현의 개인활동은 D파트가 서포트 중이었다. D파트가 맡은 연예인으로는 세현과 이재 둘뿐이다. 보통은 이재에게 서포트가 집중된다. 세현은 거기에 아무 불만도 없다. 대한민국을 씹어먹는 중인 이재는 그의 평생 친구였고 이 회사에 큰 기둥이었으며 그 녀석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들어오는 돈 단위가 달랐기 때문이다. 세현은 혼자서도 잘했다. 그리고 이재처럼 시선 집중이 되는 건 누가 시켜준다고 해도 싫었다. 지금이 딱 좋다.
“네가 봐주니까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신경 써주는 김에 곡 하나 안 줄래? 갖고 있는 라인 있으면 하나 줘 봐.”
이동주 실장이 인상을 팍 구기며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예나 지금이나 방정맞은 건 여전했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가 주머니에 넣었다가 화면을 켰다가 껐다가 하며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보다는 이재한테 들려줘 봐요. 걔가 히트곡 감별사잖아.”
“어우. 아니야. 한이재는 됐어. 그 자식 독설은 감당하기 어려워. 마음 먹고 매몰차게 굴면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속을 벅벅 긁어대는데 미쳤다고 내가 가서 상처받고 오겠냐? 됐다. 게다가 안 좋은 소리 들으면 찜찜해져서 다시 곡 찾으러 가야 해.”
세현은 큭큭 웃었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이재가 곁을 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지나온 세월이 있는 만큼 지금 이재는 동주를 꽤 친밀하게 대하는데도 불구하고 한번 뿌리 박힌 인상은 바뀌기 어려운 모양이다. 여전히 꺼리는 걸 보니.
“대표님은 뭐래요?”
“아직 거기까진 올라가지 않았어. 문정훈이가 자꾸만 시간을 더 달라고 그러네. 우리 애들 연습하는 것도 한번 봐 줄거지?”
“네. 연락 주세요.”
부드럽게 웃는 세현은 예전 열 일곱 시절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늘 온화한 사람이고 그의 주위에는 따스한 공기로 가득했다.
“대표님은 아직 미국 루버스빌에 계세요?”
“응. 그쪽 댄스 스튜디오 케빈이랑 나머지 계약 건 해결하고 와야 하니까. 너 거기 기억 나지? 선앤점프 스튜디오”
“네. 회사 내 경연대회에서 뽑혀서 갔잖아요. 사실 미국 이모집에 놀러 간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회사에선 큰 투자였어. 그때 동민이도 같이 뽑혔는데 미국 체류비를 감당 못해서 포기했지. 비행기표에 강습료는 회사에서 부담했지만 거기 체류비까지는 책임을 못 져서 미안하긴 했다. 그때 회사 사정이 좀 별로여서.”
벌써 13년 전 이야기다. 세현은 루어스빌의 푸른 바다와 하얀 2층 목조주택을 떠올렸다. 창문에 드리워져 있던 아이보리 색 커튼과 그 뒤로 흔들리던 촛불. 그리고 소녀의 손목 위에서 찰랑거리던 작고 빨간 구슬 팔찌.
“너희 이모님 생각난다. 지금도 건강하시지?”
“이모야 뭐……. 어디 가서도 자기 계획대로 생활하시는 분이시니까.”
“네 사촌……. 그 뭐냐……. 영교? 걔도 잘 있고?”
“네. 한국에서 꽃하고 조경 일해요. 가든 디자이너”
“어. 맞다. 들었어. 대표님이 그러데. 지금 재란이랑 같이 살고 있다며?”
동주가 목소리를 낮췄다. 동주의 입에서 재란의 이름이 나오자 세현이 눈을 치켜떴다.
“이재란? 한국 왔어요?”
“응. 들어온 지 두 달쯤 됐을걸. 아예 들어온 모양이던데? 대표님 말하는 거로 봐선 한국에서 결혼시킬 모양이야. 재란이 외가 쪽에서 사람 봐놨으니까 결혼시키자고 하더래. 그런데 그건 그냥 표면적인 이유고 사실은 그쪽 할머니 몸이 많이 안 좋아지신 거 같더라. 그 집에선 재란이가 그 할머니를 맡아줬으면 하는 거지. 너도 알잖아. 그 할머니, 성격 엄청 깐깐한 거. 그거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재란이뿐이니까.”
세현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갑자기 목이 텁텁하니 물 한잔이 간절해졌다. 동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컨트롤 박스쪽으로 걸어가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 들었던 곡이 다시 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