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비밀이 있어. 네가 알면 깜짝 놀랄걸? ”
-<미국에 도착한 영교가 처음 세현에게 보낸 이메일 중에서.>-
LA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뉴포라비치. 바다 쪽으로는 부자들의 유럽풍 별장이 자리 잡고 안쪽으로는 비슷하게 생긴 2층 주택이 바둑판처럼 늘어서 있다. 이 동네의 자랑은 4km에 이르는 긴 발보아 해수욕장이다. 일 년 내내 평온한 바다는 어린아이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파도와 수온이 적당하다. 그래서 이곳은 중산층 가정이 자녀를 교육하고 키우는 곳으로 안성맞춤이다.
동네의 상권은 해수욕장을 따라 형성되어 현지인은 물론이고 관광객이나 휴가온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아침에는 카페가 가장 먼저 문을 열고 선선한 저녁이면 레스토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뉴포라비치 타운의 가장 바깥쪽에는 역사 깊은 씨유스넘 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해양 생태계와 멸종 바다 동식물 연구로 유명하다. 작은 대학이지만 북극이나 남극으로 탐사를 보낼 만큼 재정적 지원이 튼튼하다고 평판이 나 있다. 그리고 이 대학은 여러 국제단체들과 협력하는 씨 세이브 어스 운동의 발원지다. 세현의 이모, 김명희는 바로 그 운동의 주창자 중 한 명이며 씨유스넘 대학에서 해양식물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LA에 있는 댄스 스튜디오에서 한 달간 특강을 들으러 온다는 세현에게 이모는 차갑게 말했다.
“세현아. 네가 오는 건 좋은 데 온다고 해서 내가 널 돌봐줄 시간이 없어. 그건 알고 와야 해.”
세현 역시 아무 기대가 없었다. 이모는 늘 바쁜 사람이다. 이모와 정이 넘쳐서 이모 집에 머무르겠다고 한 건 아니다. 사촌 영교가 있어서 결정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더니 영교는 갑자기 그들의 곁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중 3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 명희가 딸을 불렀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엄마 옆으로 와.’
안가겠다고 울고불고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영교는 선선히 가겠다고 나섰다. 세현은 섭섭해서 마음이 크게 상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이렇게 후딱 간다고 할 줄이야. 우리가 지내온 시간이 얼마인데! 세현도 세현이지만 엄마인 영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좋아해서 내 아이 남의 아이 두루 품고 빨고 아끼는 영희는 영교를 정말 친딸처럼 여겼다. 그런 엄마를 배신하다니. 그래서 세현은 영교가 출국할 때까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쌀쌀맞게 굴었다. 곧 후회하긴 했지만 말이다.
미국으로 가고 이 년 동안 영교는 딱 한 번 한국에 들어와 잠깐 얼굴만 보여주고 다시 돌아갔다. 제대로 보는 건 이게 처음이었다. 엄마는 세현에게 영교를 제대로 보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엄마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우리 영교가 얼마나 컸는지 직접 보고 와. 밥은 잘 먹는지, 힘든 건 없는지, 새아빠랑도 잘 지내는지 확인 꼭 해야 해. 그리고 내가 너무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고.”
아닌 게 아니라 걱정이 되긴 한다. 영교가 미국으로 간 그 해, 이모는 잭 그린이라는 미국 남자와 재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렸다. 감정제로 이모가 어떻게 연애를 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엄마와 이모는 자매간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한 명은 감정제로의 냉정한 여자라면 다른 한 명은 감정이 풍부하다 못해 흘러넘친다.
세현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재를 힐끗 보았다. 이재는 오른쪽 귀에 작은 링 귀걸이를 걸고 있다. 그뿐인가. 목에 주렁주렁 건 목걸이며, 허리띠에 매달고 있는 액세서리며, 한이재 인생에서 최대로 멋을 부리고 왔다. 불쌍한 자식. 분명 영교는 잔소리해 댈 게 분명했다. 옷차림이 그게 뭐며 정신부터 똑바로 차리라고 말이다.
“이쪽 길이 맞나? 세현아. 주소가 노슬란 스트릿이 맞지?”
“네.”
그들의 보호자로 미국에 함께 온 이 실장님은 연신 밖을 확인하며 매끄럽게 핸들을 돌렸다. 타운 안으로 들어오면서 속도는 30km를 유지하고 있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세현은 자신도 이곳에 와 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딱히 어떤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헛된 상상이었다. 현재 세현은 아이돌인지 배우인지 아무튼 연예인이 되겠다고 연습생이 되어 훈련을 받고는 있지만 제대로 선택을 한 건지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진짜 원하는 게 이건가? 이게 내 길인가? 사실은 다른 운명이 있는 걸지 모른다. 이 길은 그저 남보다 조금 보기 좋게 생겨서 편하게 한 선택일지도. 세현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데뷔조가 되고 이렇게 미국에 댄스 연수도 왔다. 마음에는 여전히 잔물결이 일고 있는데 말이다.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이 실장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자리에 앉은 이재가 긴장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도로를 따라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다.
“뭐 눈에 띄는 특징 같은 거 없어? 집들이 다 똑같아.
”초록색 우체통이 있는 집이랬어요. 그…. 새 이모부 이름이 잭 그린이라서 초록색을 칠했다고.“
아직 이모부라는 말이 어색해서 세현이 말에 뜸을 들였다. 사진으로만 봤을 뿐 한 번도 실물은 본 적이 없다.
”너희 들어가는 거 보고 나는 바로 돌아갈 거야.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사고 치지 말고. 알지? 무슨 말인지.“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미국까지 따라온 이 실장님은 혈기 왕성한 두 녀석을 떼어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목소리가 커졌다. LA에 있는 스튜디오에는 같이 연수를 받으러 온 연습생 두 명이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넷 중에 둘이 빠져주는 것만 해도 좋은 모양이었다.
”이제까지 맡겨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 실장이 중얼거렸다. 혹시 자기를 다시 데리고 갈까 걱정이 되었는지 이재가 얼른 대답했다.
”세현이랑 저는 한 세트입니다.“
덩치는 커다란 게 겁쟁이인 거 다 티 난다. 세현은 피식 웃었다. 오매불망 그리던 서영교 만나니 좋겠지. 그동안 보고 싶은 거 어떻게 참았나 모르겠다. 사실 세현도 좋았다. 영교는 세현에게도 중요한 사람이다. 떨어져 있으면서 영교의 잔소리가 그리웠을 정도다. 이번에 영교에게 자신의 마음 상태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영교라면 단순한 정답을 내려 줄 것이다.
십여 분이 흐른 뒤 초록색 우편함이 있는 집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리자 한낮의 태양 빛은 뜨거웠고 공기는 그보다 살짝 서늘했다. 세현은 백 팩을 고쳐 매고 현관문처럼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 실장이 도와주면 좋겠지만 차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저렇게 부끄럼 많은 어른 남자가 이 업계의 일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자신이 열 여덟 살 소년에게 안쓰럽게 보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실장님은 돌아보는 세현을 향해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얼른 가란 소리다.
잭 이모부의 집 현관문도 초록색이다. 초인종이 어디 붙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세현과 이재가 긴장한 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안에서 왈칵 문이 열리더니 웬 소녀가 튀어나왔다. 그들이 누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소녀도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급히 멈추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달려오던 두 다리는 가속도가 붙어 쉽게 멈추지 못했다. 세현이 어버버 거리는 사이 소녀는 몸을 틀었지만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녀는 그대로 세현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심장을 강타하는 아픔. 그리고 사방에 퍼지는 케첩과 머스터드의 냄새.
윽.
세현은 짧은 신음을 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세현의 발치로 잔뜩 뭉개진 핫도그가 떨어졌다. 소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곧바로 정면을 향했다.
–아우 씨. 이 덜렁이가!
세현은 핫도그를 들고 자신에게 덤벼든 상대가 영교라고 생각했다. 집안에서 세현과 이재를 보고 반가워서 뛰어나오다가 이런 사태를 만든 거라고.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아끼는 셔츠를 망친 건 어쩔 것이냐고 소리를 지를 참이었다. 그러나 세현의 앞에는 낯선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무지 흰 티셔츠에 검은색 반바지를 입은 키가 늘씬하게 큰 여자아이였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였다. 그건 화선지에 그려진 검은 달처럼 선명했다. 한 점의 빛을 발견할 수 없는 어두운 눈동자. 그보다 더 짙은 눈썹은 당황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끝이 하늘로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다. 세현은 눈을 찡그렸다. 낯이 익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오. FUCK! ”
강렬한 한마디를 남기고 그 여자아이가 난감한 얼굴로 집안을 들여다보고 다시 세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는 얼굴이 확실했다. 그나저나 셔츠 왼쪽 가슴께에 묻은 케첩과 머스터드의 냄새는 정말 강렬했다. 원산지인 미국산이라 그런가. 양도 엄청나고 냄새도 진하다. 세현은 무의식중에 끈적이는 소스를 손으로 만졌다. 그러자 그 낯선 여자애가 세현의 손을 낚아챘다.
“만지지 마!”
낮고 끝음절이 명료한 목소리였다. 세현이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여자애는 세현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세현으로서는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엄청난 힘이었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가련한 별처럼 세현이 잡혀가자 뒤에 멍하니 서 있던 이재가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소녀와 세현, 두 사람과 엇갈려 현관으로 걸어 나온 영교와 마주치자 이재는 뻗던 손을 그대로 영교의 어깨로 가져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너희 언제 왔어? 내 핫도그는?”
양손에 콜라가 가득 든 컵을 들고 있던 영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세현이가 재란이한테 잡혀가고 있어?”
대답 대신 이재는 영교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당겨 안았다. 영교가 엉거주춤 그에게 안겼다.
“뭐야?”
“미국에 왔으니 미국식 인사.”
“웃기시네. 이거 안 놔? 대답이나 해!”
그 사이 세현은 부엌까지 끌려와 있었다. 여자애는 서둘러 세현의 가방을 벗기더니 곧 그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당황한 세현은 여자애의 손을 잡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세현은 시뻘게진 얼굴로 여자애의 두 눈과 이마, 눈 아래 볼록한 애교살을 더듬더듬 보았다. 이렇게 생기면 잊을 리가 없는데?
“빨리 세탁해야 해. 안 그러면 얼룩져.”
“내가. 아…. 내가…. 내가….”
더듬더듬 세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자애는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재빨리 개수대로 가 커다란 볼에 물을 받았다.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런 행동이 세현에게도 빨리하라는 압박으로 느껴졌다. 손가락이 꼬여 단추가 잘 풀리지 않자 세현은 그냥 위로 훌러덩 벗어 버렸다. 여자애가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세현은 기억이 났다. 저 애가 누구인지.
“너희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오는 거 아니었잖아?”
영교가 들어오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답을 듣기 전에 영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다시 물었다.
“박세현. 너 왜 벗고 있냐? 몸매에 그렇게 자신이 있어? 그 정도는 아닌데?”
“시끄러워.”
“재란아. 네가 얘 벗겼어? 빠른데?”
재란아. 분명 영교가 그렇게 불렀다. 세현은 확신이 섰다. 세현은 셔츠를 건네주며 눈앞의 소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3년 만에 만나는 재란은 키가 훌쩍 자랐고 예전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그때도 인형같이 반듯하게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싱그럽고 화사해서 주위의 시선을 다 끌어들이는 오월의 장미 같았다. 세현의 셔츠를 받아드는 재란의 가느다란 팔목에 빨간 구슬이 알알이 꿰어진 팔찌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일부러 부딪친 건 아니야. 네가 갑자기 거기서 나올지 몰랐거든.”
재란은 셔츠를 물에 푹 담그고 세제를 가득 풀었다. 그리고 돌아보더니 또 픽 웃었다.
“박세현.”
재란의 입에서 그의 이름 석 자가 나왔다. 세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사이 이재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나한테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
그 말에 뭔가 깨달은 듯 영교가 두 팔을 활짝 벌리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서프라이즈!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 몰랐지? 놀라게 해주려고 입 다물고 있었다고.”
세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영교를 보았다. 이게 무슨 서프라이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