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추억
아직 새로운 동네에서 뚫지 못한 곳이 몇 개 있어서 (마트, 세탁소, 김밥집 등) 예전에 살던 집 근처를 자주 가곤 한다. 불과 두 달 전까지 살았던 곳인데도 아이는 늘 장난처럼 말한다. "엄마, 저 아파트가 왜 이렇게 높아 보이지?"
아파트 단지 밖에서 보는 아파트는 정말이지 꽤 높아 보였다. 뭔가 낯설다 저곳. '외부인 출입금지'라 놀이터 앞에 붙어있는 안내판도 왠지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진다. 이제 저곳은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에..
집을 떠나기 직전인 12월 한 달 동안 매일 집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엮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하지만 만들어 놓은 책을 제대로 펼쳐본 적이 없었다. 지금 집의 매력에 푹 빠져 예전 집을 참 빨리도 잊었다.
책을 펼쳐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잊고 지냈던 집의 풍경과 냄새, 온도가 느껴져 잠시 향수에 젖었다.
자니..?
아 이게 아니지. 잘 지내지?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너에게 썼던 편지를 다시 읽으며 오늘은 네 생각을 많이 했어.
지금 너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내길 바랄게.
집에게 보내는 편지
이 집에 살면서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은 주방이었지.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는 순간이 늘 행복했고 그런 내가 좋았어. 무언가를 먹고 먹이는 것이 내 삶에 이토록 중요해질 줄 미처 몰랐는데 그걸 알게 해 줘서 고마워.
화가 날 때, 속상할 때, 외로울 때면 난 늘 싱크대 앞에 섰어. 차가운 물이 손에 닿으면 시커메진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거든. 위로의 장소가 싱크대 앞이라는 게 조금 울적하긴 하지만 그래도 꽤 마음에 드는 나만의 공간이었어.
알고 보니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편이더라. 2년간 단 한 번도 집 안의 가구 배치를 바꾼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친한 언니의 집에 놀러 갔다가 매일 집을 가꾼다는 이야길 듣고 그날 바로 식탁을 거실로 옮겨봤어. 너도 마음에 들었니?
코로나 이후로 여행 대신 캠핑을 더 많이 갔던 것 같아. 자연 속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온 가족이 외치던 말, 뭔지 알지? "역시 집이 최고다!" 며칠간 비웠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늘 따뜻하게 맞아주던 너.
우리 가족이 이 집에 살면서 가장 아끼던 곳은 너도 잘 알겠지만 커다란 거실 창이었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네 번 바뀔 동안 우리 아이들도 많이 컸구나. 늘 같은 자리에서 사계절을 함께 맞아줘서 고맙고, 많이 그리울 거야.
가족을 위해 밥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기뻤지만 몸이 힘든 날은 솔직히 만사가 귀찮기도 했어. 백신을 맞았던 날, 아이들이 엄마 쉬라고 저들끼리 자르고 볶고 꾹꾹 눌러서 만들어준 주먹밥은 이 집에서 먹어본 그 어떤 음식 중 최고였어.
너와 함께한 날들 중 아름답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어. 친구 사귀는 것에 서투른 아이를 위해, 생일날 반 친구 18명을 초대했던 날 기억해? 아이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어. 그날따라 네가 더 예뻐 보였고 고마웠어.
아이들이 주말을 기다리는 이유는 거실에 이불을 펴고 다 같이 모여 자는 날이기 때문이지. 거실에 요를 깔고 폭신한 이불 위에서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던 주말이 앞으로도 무척 그리울 거야.
2019년 겨울, 갑자기 TV가 고장 났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TV 없이도 웃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게임을 하고 이야기 나누고 책도 보고.. 매일매일 웃음이 끊이지 않는 거실이 되었어. 웃느라 사진이 다 흔들렸지만 저 날의 기억이 생생해 :)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아이가 많이 아팠어. 일주일 입원을 하고 집에 돌아왔고, 그때부터 1년간 집콕 생활을 했지. 그 어떤 곳보다도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가 되어주어서 너에게 이보다 더 감사할 일이 또 있을까 싶어. 고마워 나의 집.
맙소사! 이때 기억나? 8월에 이사를 오고 며칠 안돼서 찍었던 사진이야. 사진 속의 3살 꼬꼬마가 이제 초등학생이 되네. 가물가물했던 기억을 다시 꺼내어 보니 마음이 뭉클해져.
우리 집에서 처음 광고 촬영을 했던 날은 영광의 기념일이 되었지! 화장품 촬영이었던가? 광고 속에 등장한 너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참 예뻤어. 이곳에 사는 동안 재미난 추억이 참 많았어, 그렇지?
매년 12월 25일에 산타 할아버지가 어김없이 집에 찾아와 주셔서 어찌나 다행인지 몰라. 2019년 연말에 선물 받았던 양말과 슬리퍼는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이야. 올해에는 어떤 선물을 받게 될까?
아이 손 잡고 밖에 나가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늘 하는 말씀이 있어. "이때가 좋을 때다." 이제야 조금 그 말이 이해가 돼. 아이들이 6살, 3살이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 녀석들을 더 으스러지게 안아주고 싶어.
처음으로 치아바타를 성공했던 날이었지. 온 집안에 고소한 향이 가득했고 아이들은 또 달라고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어. 몇 개 안 남은 치아바타를 주변 이웃과 나눠 먹으며 완벽한 주말이었다고 생각한 날이야.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오늘, 온 가족이 거실에 이불을 깔고 하루 종일 뒹굴뒹굴 거린 날이었어. 특별하다 할만한 추억은 아니지만 오늘 하루 느낀 편안함은 오랜만에 느낀 최고의 휴식이었어!
이 집에 사는 동안 가장 멀리 떠났던 여행은 제주도 여행이었지. 작은 나무 데크가 있는 숙소에서 매일 햇볕을 쬐었었는데 그게 좋아서 결국 주택으로 이사가 길 결심하게 된 것 같아. 그래도 네가 무척 그리울 거야.. 정말로.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신랑이 꽃을 사 오기 시작한 것 기억나? 집에 꽃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며 매주 새로운 꽃을 사 왔지. 매일 물을 갈아주고 줄기의 끝 부분을 잘라주는 일이 귀찮기도 하고 낯설었지만 꽤 기분 좋은 일탈이었어.
일과 육아에 지치는 날마다 와인 한 잔 마시면서 날 응원하고 위로했던 것 같아. 편안한 소파에 앉아 마시는 달콤 쌉싸름한 와인 한 모금이 나에게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다고, 요즘 많이 힘들었지? 하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 오늘 밤에도 한 잔 콜? :)
임경선 작가님을 우리 집에 처음 초대했던 날 기억나? "다정한 이웃, 시연 씨에게"라고 쓰인 책 선물을 받은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할 거야. 하필이면 같은 날 신랑이 빨간 장미를 사 와서 그날의 기쁨이 두배가 되었지!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나에겐 기적 같아. 취미로 굽던 빵이 나의 작은 사업이 되었고, 그로 인해 상도 받고 말이야 :) 빵으로 인해 매일 조금씩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행복해.
집은 엉망이 되었지만 야니 조이와 함께 거실 창을 색종이로 꾸미던 날이 기억에 오래 남아. 아이들 시선으로 예쁘게 너를 단장해 주었던 날, 너도 오래 기억하길 바랄게.
내 삶을 가장 빛나게 해 주고 나를 매일 돌아보게 해주는 나의 보물들. 아이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는 지금이 나에겐 가장 소중하고 행복해. 하루하루 쌓여 지금의 행복이 되기까지. 늘 함께해줘서 고마웠어. 즐거운 나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