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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유 Aug 16. 2022

흉내내는 삶의 즐거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뭐든 중간 이상은 했다. 공부도, 글쓰기도, 그림도, 노래도, 만들기도.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뭐든 어중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어중간한 재능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어중간 컴플렉스'를.


엄마의 조기교육 사랑으로 유년시절 나는 이것저것을 짧고, 다양하게 배웠다. 그중 하나가 그림이었다. 화실에서 제일 처음 배운 것은 데생. 처음에는 원기둥, 원뿔, 삼각뿔, 정육면체 같은 기본 도형을 그렸고, 익숙해지고 나서는 일상적인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로 벽돌, 소주병, 북어포, 신발, 사과 같은 것들이었다. 가장 연습이 필요한 정물은 사과였다. 사과는 얼핏 단순해보이지만, 실은 명암과 질감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 소묘의 기본이 된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며칠 동안 매일 같이 사과를 그리다보니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다. 어느 순간 사과를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도 생각만으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과의 꼭지부터 시작해 봉긋 솟은 위 부분을 지나 갸름하게 들어간 아래쪽 라인, 비교적 평평하고 좁은 바닥까지. 명암은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반사광의 위치는 어디인지도 머리 속에 그려졌다. 이쯤 되니 직육면체인 벽돌은 너무 쉬웠다. 아마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뭔가를 흉내내는 방법을.



ⓒ Pixabay



그렇지만 나한테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딱히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고 따라 그리는  반복하면 누구든 이 정도는 할  있다고 생각했다. 보다 상상해서 그리는  젬병이었다. 한번은 화실 수강생들이  같이 공원에 놀러 갔다와서 수채화를 그린 적이 있는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럴 거면 사진이라도 찍으라고 하시지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림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뭐든 중간 이상은 했다. 공부도, 글쓰기도, 그림도, 노래도, 만들기도. (물론 춤은 아직도 몸치입니다만)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뭐든 어중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어중간한 재능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어중간 컴플렉스'를. ‘음악밖에 하고 싶은 것이 없어 음악으로 먹게 살게 됐다’고 말하는 어떤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부러워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안온한 삶을 위해 대기업 공채를 준비하는 친구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기업에는 취직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며 방송 프로덕션에 들어갔고, 어떻게든 작가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속에는 나를 어중간에서 벗어나게 해줄 뭔가 다른 삶이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 Photo by Sam McGhee on Unsplash



어중간한 대신 열심히 했다.  덕분인지  좋게도 막내작가로 일한  9개월 차에 서브작가로 입봉했다. 입봉한   2  어느 , 제작사 대표님이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내가  내레이션 원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네가 말할 때는 기억에 남는 말을 많이 한단 말이야, 근데 그게 원고에서는  드러나. 모든 문장이 풀어져 있단 말이야. 네것이 없고 흉내를 내고 있잖아."


대표님은 내가 막내작가일 때부터 팀장 피디로서 나를 지켜봐왔던 방송 선배였다. 입봉을 하기 위해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겼다가, 원고를 쓰는 작가로서 같이 일하게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원고에 대해 이만큼 따끔한 지적을 받은 적이 없었다. 흉내를 내고 있다니. 그제야 내가 어떤 일에 있어서든 중간은 하지만 특별할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십대 초중반, 갓 작가가 된 나는 가끔 겪어보지 못한 감정을 원고로 쓰는 게 부담스러웠다. 사진을 찍는 시각 장애인들의 마음이라든지, 뒤늦게 결혼식을 올리는 중년 부부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인터뷰하고, 고민하면 될 껄. 작가라면 뭐든 상상해서 멋진 문장으로 포장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흉내만 냈나보다.


며칠 지나서였나, 같은 팀에서 일하던 선배 작가는 내게 말했다. "사실 나도 어렸을  흉내내는  잘했었어." 선배는 막내작가에서 바로 다큐멘터리 메인 작가로 입봉을  드문 케이스였다. 선배가 막내작가로 일할 당시 담당 피디에게 인정을 받아 단숨에 다큐 메인작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선배는 본인도 익숙치 않은 톤의 원고를   다른 작가가  원고를 미리 읽어본다고 했다. 원고 쓰기 직전에 반복해서 읽으면  톤앤매너에 적응해서 원고가   써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그랬다. 비슷한 아이템의 원고를 찾아서 입으로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했다. 당시엔 좌절감이 너무 커서 큰 위로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흉내를 잘 내는 것도 재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언젠가 내것을 찾을 수도 있겠지.






그토록 남들과 다른 삶을 원하던 나는 몇 년 후 다수의 삶을 살게 되었다. 다수의 삶이라 함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출근하고, 일을 하고, 퇴근하고, 쉬는 그런  말이다. 규칙적인 삶을 살게 되니 이전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누구와 먹는지가 중요하다며 아무 술집이나 들어가던 나는, 블로그를 정성스레 검색해서 맛집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인디 음악을 고집하던 내가 아이돌 음악을 듣고 퍼포먼스 영상을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엑소의 칼군무를 보면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 . 은퇴한 부모님의 건강보험료를 내드릴  있게 됐고, 이자가 저렴한 전세대출을 받아 서울로 이사를   있게 되었다. 흉내내는 삶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우리는 다른 것을 흉내내기를 부끄러워 한. 하지만 경우에 따라 흉내내는  자체가 능력이  수도 있고,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다. 내가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기록> 읽고 나도 에세이를 써볼까, 흉내를 내게  것처럼.  세상에 수많은 퇴사 에세이들이 있지만 나도 써보기로 마음 먹은 것처럼. 누구든 오리지널에 범접할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닿으려고 노력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흉내를 낸다. 그리고 저마다 각자의 즐거움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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