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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 Aug 10. 2021

뛸르끄 씨가 주운 성냥은 무엇을 밝혔나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공모(성냥팔이 소녀)



  지독히도 추운 날이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에겐 훨씬 더 추운 겨울이었다. 그래도 일 년 중 하루, 적어도 이 날만큼은 그들도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바로 그해의 마지막 저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작은 웃음이 구석구석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리의 모든 벽돌집 창문은 주황색 빛으로 반짝였다. 그 온기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거리를 지나는 눈의 요정들은 갈 곳을 잃고 골목 구석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따뜻한 작은 웃음들은 밤 사이에 하나 둘 눈보다 더 하얀빛을 내며 어두운 하늘 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건물에 가려져 빛이 어디까지 가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 빛들은 이 땅 저편으로 넘어갈 것처럼만 보였다. 얼마 뒤에 어두컴컴한 하늘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땅 저편에서, 사람들의 웃음과 희망을 전달받았을 바로 그곳에서 찬란한 붉은빛이 드디어 새해의 아침을 영광 속에 밝히려고 했다.




  뛸르끄 씨는 아침 일찍부터 시청 사람들과 함께 거리의 성당을 돌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작년 말에 새로 부임한 배불뚝이 시장은 언제나 까만 중절모를 쓰고 고풍스러운 고목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새해를 사람들과 축복하며 보내려는 시장이라니! 부임했을 때부터 덕망 있고, 자비롭고, 유능한 그런 사람이었으니, 이런 배불뚝이 중절모를 싫어하는 사람은 시내에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이처럼 새해 아침에 모두가 서로에게 진심 어린 축복을 건네는 행복한 도시였다.

  해가 아직 높이 뜨기 전이었다. 뛸르끄 씨는 마차를 타고 다음 성당으로 가려고 했다. 뛸르끄 씨는 웃으며 배웅해 주는 사람들 너머로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뛸르끄 씨가 마차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으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뛸르끄 씨의 절뚝이는 걸음이 빨라졌다. 뛸르끄 씨는 갑자기 제자리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크게 뛸르끄 씨를 불러봐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뛸르끄 씨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멈춰 서 있는 뛸르끄 씨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다 같이 뛸르끄 씨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가 되어, 눈앞에 놓인 붉은 벽돌 건물 모퉁이에 뻣뻣하게 앉은 채로 얼어 죽은 소녀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뛸르끄 씨의 뒤에서 많은 사람들이 웅성댔다. 누군가는 울음을 훔쳤고 누군가는 혀를 차며 자리를 떠났다. 한참 동안 푹 꺼졌던 뛸르끄 씨의 고개가 다시 천천히 위로 들렸다. 소녀, 추위 속에 모두가 행복을 그릴 때 얼마나 추웠을까. 신발도 신지 않은 소녀의 모습은 뛸르끄 씨를 더 슬프게 했다. 이 소녀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나 혼자 따뜻했다고 생각하며 자책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았던지. 뛸르끄 씨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뛸르끄 씨의 눈은 소녀를 향해 있었다. 검게 그을린 소녀의 양손엔 새까맣게 타 재가 돼버린 성냥개비 뭉치가 담겨 있었다. 그 작은 손으로 얼마나 꽉 쥐었는지! 이 불쌍한 소녀는 작은 불꽃에 몸을 녹이려고 했던 것이다. 당신은 이 추위를 그런 작은 불꽃으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소녀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에겐 집도, 외투도, 신도 없었다. 오로지 이 성냥이 전부였던 것이다. 겨우 작은 불꽃 하나가, 그것도 바로 꺼져버리는 성냥불이 소녀에겐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소녀가 지핀 작은 성냥불은 소녀에게만큼은 새해를 가져다주는 새벽의 빛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떠한 것보다 더 밝은 빛, 어두움을 끝내는 희망의 빛이 얼어버린 소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었을지도 모른다! 뛸르끄 씨도 소녀의 마음을 느낀 것 같았다. 뛸르끄 씨는 허리를 숙여 소녀의 손에 있는 시꺼먼 성냥개비 뭉치에서 아직 성해 보이는 성냥 몇 개를 주워 들었다.

  뛸르끄 씨는 성냥 하나를 벽에 그었다. 치지직, 탁! 성냥은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성냥개비 끝에서 불꽃이 크게 일어났다. 따뜻한 붉은빛이 뛸르끄 씨를 감쌌다. 이렇게 따뜻할 수가……. 뛸르끄 씨가 그 빛을 눈앞으로 가까이 하자 불꽃 위로 새하얀 빛이 일었다. 그 온기는 뛸르끄 씨가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따스함이었다.

  뛸르끄 씨는 갑자기 자신이 나무로 만들어진 따뜻한 오두막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느꼈다. 벽난로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뛸르끄 씨는 눈을 찡그렸다. 그건 소녀였다. 소녀와 소녀의 할머니였다. 이제 둘의 얼굴이 보일 듯했다. 그때 작은 불꽃은 꺼지고 뛸르끄 씨의 손엔 다 타버린 성냥이 들려 있었다.



  소녀가 성냥의 불을 켰을 때, 소녀는 분명 따스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뛸르끄 씨처럼 곧바로 두 번째 성냥개비를 벽에 그었을 것이다. 뛸르끄 씨는 성냥으로 다시 치지직 소리를 내며 소녀가 무엇을 보았을지 생각했다. 작은 불꽃이 뛸르끄 씨의 손끝에서 다시 타올랐다. 이번에도 빛은 너무 밝았다. 눈이 멀 것만 같은 밝은 빛이었다. 뛸르끄 씨는 그 빛 너머로 다시 소녀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소녀는 누구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따스한 모닥불 앞에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있는 소녀. 추위나 눈 같은 단어는 결코 그 자리에 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문득 소녀가 뛸르끄 씨를 쳐다봤다. 뛸르끄 씨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음을 느꼈다. 소녀가 경쾌한 걸음으로 뛸르끄 씨에게 다가왔다. 행복하게 웃는 소녀의 따스함이란! 소녀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뛸르끄 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불꽃이 다시 꺼지고 말았다.

  뛸르끄 씨는 얼른 남은 성냥개비를 모두 벽에 그었다. 치지직, 치지직... 하지만 불꽃은 일어나지 않았다. 뛸르끄 씨의 손에 남은 성냥개비는 모두 새까맣게 그을린 것들 뿐이었다. 뛸르끄 씨는 혹시라는 마음에 몇 번이고 벽에 성냥을 그었다. 하지만 뛸르끄 씨는 작고 밝은 그 따스한 불꽃을 다시 피울 수 없었다.

  뛸르끄 씨는 얼어붙은 소녀의 앞에 가만히,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뛸르끄 씨의 고개가 또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찬바람에 차가워진 뛸르끄 씨의 두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분명 뛸르끄 씨에게 행복하다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나는 정말 따뜻하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웃으며 말하려 했을 것이다! 뛸르끄 씨는 참아보려 했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뛸르끄 씨의 몸이 슬픔에 들썩였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도 뛸르끄 씨를 따라 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던 뛸르끄 씨는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뛸르끄 씨의 눈에 맺힌 눈물이 따스한 햇빛에 반짝였다. 뛸르끄 씨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희망이란 이런 것인가."




  "소녀는…, 행복할 겁니다." 뛸르끄 씨가 말을 마쳤다. 소녀의 장례를 알리는 음악이 사람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뛸르끄 씨는 그날, 곧바로 직접 수소문해 소녀의 할머니를 찾아 그녀가 묻힌 자리 옆에 소녀를 묻어주었다. 음악이 아직 흘러나오고 있을 때 눈의 요정들이 이 작은 도시를 떠나고 있는 게 뛸르끄 씨에게 보였다. 아직은 추운 겨울이지만 곧 따스한 봄이 올 거라는 뜻이었다. 뛸르끄 씨는 소녀를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불꽃과 희망을 생각했다. 이제, 눈의 요정들이 저기 보이는 언덕을 넘어간다. 새해의 붉디붉은 저 저녁노을이 그 언덕 너머로 같이 저물고 있다. 그래, 곧 세상은 희망의 봄을 가져다줄 것이다!

  아, 참! 뛸르끄 씨가 소녀의 묘비에 어떤 말을 적었는지 아는가? 그건 눈의 요정도, 하늘의 새도 꼭 읽고 갔다. 자,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듣는 게 좋을 것이다!


  " 작은 불꽃 너머의 꿈에, 이 가여운 소녀가 닿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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