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국회의원 비율 17.7%, 여성 지자체장 비율 3.3%, 정부 고위공직자 수 7.4%, 상장기업 여성 CEO 비율 5.8%
남성들이 역차별을 소리높여 주장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주요 권력의 자리 대부분은 남성의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 까지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위치에서 시작할지 모르지만 결국 권력의 자리에 가는 대다수는 남성이다. 전국 남녀 성비는 99.3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조금 많지만 사회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대대수는 남성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젠더 권력의 지형이 그대로 이어져왔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주연을 맡은 영화는 39%에 불과하다. 특히, 정치 드라마와 같은 선이 굵은 극에서 주인공은 항상 남성들이었다. 권력을 둘러싸고 암투와 계략이 난무하는 스토리에 여성이 그 주연으로 등장하는 것은 어색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서 그런것이 아닐까 싶다.
퀸 메이커는 이러한 우리의 통념을 뒤엎는다. 여성 중심의 영화들이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선이 굵은 정치극에 여성들이 전면에 나선 경우는 없었다. 정치극에서는 권력과 돈에 대한 욕망이 스스럼 없이 드러나고 이를 둘러싸고 각종 전략과 계략이 난무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퀸 메이커는 지금까지 봐온 어떤 정치극보다도 이러한 서사가 강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조연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자본의 탐욕을 상징하는 대기업의 총수는 여자이며, 상속을 두고 암투하는 재벌가의 자식들도 모두 여성이다. 이 기업을 이끌던 최고의 전략가도 여성이며, 서민을 상징하며 재벌가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시장 후보도 여성이다. 이 모든 여성들은 그간 우리가 흔히 보던 정치극에서처럼 남성의 보조적 역할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서 각자 권력과 사회정의를 쫓는다.
이 드라마에서 최고의 악인은 남성이다. 재벌가의 사위로서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백재민, 그리고 그의 선거전략을 책임지는 최고의 선거 전략가 칼 윤. 이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 출신의 오경숙과 그녀의 선거전략을 책임지는 황도희와 대비되며 명확한 선악의 구도를 이룬다. 양측의 대결 구도는 자칫하면 성별 대결로 보일 수 있지만, 극에서는 성별 대결이 아닌 재벌과 서민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작품속에서는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만, 극을 보는 내내 저들이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는 여성의 서사가 아니라 그냥 정치극의 서사를 그냥 그대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정적인 성역할을 신경쓰지 않고 써내려 간 극본의 힘과 배우들의 엄청난 열연 덕분이다. 퀸 메이커가 특별한 지점은 이러한 여성 정치 암투극을 일반적인 정치 암투극으로써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현실에서 우리가 익히 보아온 모습들을 극으로 그대로 재연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한껏 자극한다. 첫 화에 등장하는 재벌 2세의 갑질 논란은 특정 재벌가의 마카다미아 사건을 연상케하며, 오경숙 시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취약계층의 주거공간 문제를 지적하며 신문지에 눕는 장면은 故노회찬 의원의 퍼포먼스를 연상케한다. 이외에도 선거에 정치 유튜버, 종교인들을 동원하는 모습, 재개발로 유권자의 욕심을 자극하는 모습, 시민단체의 후원금을 사적 용도로 썼다고 공격하는 모습, 자녀의 학폭 논란을 선거에 동원하는 모습 등등은 우리가 뉴스를 통해 익히 보아온 모습들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복제한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들이 이를 여성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정치극으로 보이게 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오늘날 글로벌 미디어 기업의 하나의 사업 전략이다. 전세계에서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하는 집단은 사회적으로 권력을 쥔 계층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소구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해당 콘텐츠가 보편성을 얻고 이것이 평균적인 사람들에게 소구하며 흥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PC 정책은 바로 이러한 전략의 산물이다. 넷플릭스는 2021년에 미국 남캘리포니아대(USC)의 아넨버그 포용정책센터(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에 위탁하여 다양성/포용 보고서(Inclusion/diversity report)를 발간한 바 있다. 이는 기업이 자신이 제작한 콘텐츠가 얼마나 다양한 집단들을 반영하고 노력했는지를 스스로 공개하고 평가받으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넷플릭스 콘텐츠들에서 여성이 주조연을 맡은 콘텐츠 비율은 영화가 48.4%, 시리즈가 54.5%에 달한다. 즉, 넷플릭스 콘텐츠들은 내용 다양성 측면에서 꽤나 긍정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것 또한 기업의 전략일 수 있지만 말이다.
지난 몇 달간 우리가 넷플릭스에서 열광했던 콘텐츠들의 대부분은 여성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콘텐츠이다. 정이, 더 글로리, 길복순 모두 여성이 전면에 나서는 스토리이다. 사이버펑크, 복수극, 액션 활극까지 전형적인 남성 중심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이야기들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펼쳐졌고 대중은 이에 열광했다. 퀸메이커는 이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게 만든 콘텐츠라 생각한다. 여혐이 시대의 키워드인 지금 시점에 전세계에서 가장 큰 글로벌 OTT가 보여주는 이러한 시도는 우리사회에 충분히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 가장 훌륭한 다양성 콘텐츠는 사회적 약자를 그 자체로 동등하게 그리는 콘텐츠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퀸메이커가 보여주는 세계에 큰 박수를 치고 싶다.
참고 자료
국민권익위원회(2022.5.12.). [보도자료] 정치 영역의 성별 불균형 개선 권고
경남도민일보(2021.9.7.). 여성 지자체장은 꿈? 전국 243곳 중 8명뿐
경향신문(2022.8.14.). 여성 7.4%인 14명, 장관급은 3명뿐…‘유리천장’ 다시 두꺼워졌다
ESG경제(2021.7.23.). 상장기업 여성 CEO 비율 5.8%...창업주 일가 74% 차지
중앙일보(2022.10.20.). "영화 속 주인공 성별, 남성이 61%…현실보다 높게 재현돼"
성욱제(2021). 넷플릭스 다양성 리포트가 보여주는 것들,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USC Annenberg(2021.2.26.). 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 releases study of representation in Netflix original produ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