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란드 가는 길
순간순간 적어놓은 것들을 모아놓은 기록이다. 어쩌다 보니 시간은 다 한국시간으로 적었다.
#무덤덤하다는 건
새로울 게 없다는 것. 다 그렇고 그런 것이며 그것 외에 내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 아니 스스로 못하고 있는 것. 눈으로 내가 보는 풍경은 낯선 것이지만 아직 마음의 풍경은 그대로인가보다 한다. 설렘은 어떤걸까. 그 순간 모든 억압에서 풀려나 완전하고 행복한 기대를 하는 것. 대개 그런 것들은 착각이고 경계하지 않다가는 남을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그래도 그 순간이 행복한 건 어쩔수가 없다. 모든 괴로움따위는 잊고 행복할 것만 같은 행복으로 가득찬다. 따지고 보면 다 착각속에 산다.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잘 안될 거라는 착각, 잘 될거라는 착각. 감정은 그에따라 왔다갔다 한다. 물론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만 기억 속에는 영원할 것 같은 감정의 그 기분이 남는다.
무덤덤하다는 건 그래서 기대가 없다는 뜻이다. 없을리가 없지. 기대를 하지 않으려는 건지도. 기대는, 착각은 대개 부서지기 마련이고 그것은 불행을 느끼게 하니까. 상처가 된다. 좋은 기대를 하다 깨지면 너무 힘드니까 최악을 생각한다. 그건 밑져야 본전인가. 하지만 너무 심하면 지금을 망친다. 지금이 망가지고 그래서 미래도 망가진다. 문제는 망가진 미래가 오면 거봐 맞잖아 하면서 스스로 최악의 기대를 한 것을 더 강화한다. 더 더 최악을 생각하게 된다. 가볍게는 회의적이 되거나 비관적이 되거나 더 나아가서는 삶의 의미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지금이 너무 힘들어서 어두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나는 안 좋은 쪽으로 기대를 하게되지만 최악까지는 아닐거라고 믿는다. 그건 다 나를 지켜봐주었고 잘 이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하는 사람들 덕이다. 그 사람들이 나의 안전망인 셈이다. 다시 나쁜 기대의 반대편으로 넘어가고 싶다.
인천(ICN)-파리(CDG)로 가는 동안의 기록이다. 그것도 거의 12시간이 걸렸다. 설레거나 들뜬다거나 아니면 어떤 일상적인 기분의 색이 아주 미세하게라도, 변하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출발했다. 그린란드로 간다.
한국시각 14:08
지금 모닝롤을 먹으며 후회중이다. 사실 닭가슴살 덮밥이라고 말할 때부터 나는 이미 혼돈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닭가슴살 스테이크. 불고기 덮밥. 난 둘 다 먹고 싶었다. 그리고 닭가슴살 스테이크를 시켜놓고 아마 그린란드 가면 밥 따위는 먹지도 못할 텐데 왜 비행기서부터 굳이 닭 가슴살 스테이크를 시켰는지 후회하며 모닝롤을 먹고 있다. 그냥 뭐든.. 불고기 덮밥은 어딘가 헛헛할 것 같은 느낌이 왠지 모르게 들었다.
아마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랬던 것 같다. 배가 너무 고파서 기내식 트레일러가 가까이 오는데 미드 보던 이어폰을 5번이나 뺐다 꼈다. 언제 물어보나 해서. 어제부터 내가 다시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것 같다. “괜히 왔나.” 스스로 와놓고도 왜 왔는지를 묻는 사람이 어제 오늘 둘이나 된다.
한국시각 15:18
아 담배피고 싶다. 세 시간 지났다.
비행 중에 불을 끄는 시간은 한국과 파리의 시차와 더불어 비행시간 등을 고려해 생체리듬에 최대한 맞춰주게끔 설계되어있는 걸까. 갑자기 졸린데 잠이 안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계산된 걸까. 한국시간으론 오후 세시. 졸릴 시간이 아니다. 그러면 파리 시간에 맞춰주는 건가. 파리는 우리보다 한 8시간이 느리니까 오전 8시... 것 참 기준이 뭘까. 아침잠을 재워주는 건가. 밥을 먹였으니 이제 자라는 건가. 아마 다시 불이 켜지면 난 졸릴 것 같다. 자둬야지.
한국시각 17:34
타이밍이 참 오졌다고 생각했다. 온갖 짐을 풀어놓은 집에서 엄마와 전화로 한창 나를 좀 믿어달라고 씨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목소리를 높이는 중에 네게 부재중이 왔다. 아직도 ‘사랑하는’이라니. 그건 어째 지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가을에 다시 만났을 때, 울렸던 전화처럼.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조급해지지 않겠다고, 너로 인해 다시 흔들리지 않겠다며 네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엄마 전화를 마쳤다. 다시 전화했을 때, 넌 통화 중이었다. 그래 누군가 그냥 필요했나보지.. 그런데 왜 나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을까. 네가 앉아있던 놀이터, 우리가 함께했던 벤치, 그 횡단보도까지 나는 너를 찾아 뛰어다녔다. 아무데도 너는 없었다. 난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날 그렇게 뛰어다니고 나서, 너를 만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척 했다. 네가 다시 날 찾아오고, 내가 네 전화에 그렇게 뛰어다니고, 날 보자마자 환하게 웃고, 그런 것들이 다 아무것도 아닌 척 했다. 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무것도 모르겠으니까. 내 모든 말과 의도가 왜곡되는 걸 막지도, 이해시킬 수도 없었으니까. 어떤 말도 설명할 수록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난 왜 뛰었을까. 다음날 나는 그린란드로 가는데.
한국시각 19:15
배고파... 군대에서 일기 쓰라고 그렇게 주변에서 ㅈㄹ을 해도 안 쓰더니 비행기에 앉아서는 두 시간에 한 번씩 쓰고 있다. 저녁 기내식이 나왔는데 인스턴트 치킨 부리또가 나왔다. 망할 인스턴트 치킨 부리또라니. 배고파 죽겠다고. 사진 찍을 새도 없이 그냥 받자마자 먹었다. 그리고 빈 포장지를 찍었다. 예전 런던으로 갈 때, 그 비행기 안에서도 이렇게 배고팠던 것이 이제야 기억난다. 옆 칸 사람은 삼각김밥을 싸와서 먹었다. 비행기 많이 타 보셨나보다. 다음엔 저런 걸 싸갖고 와야겠다. 유럽가면 이제 밥값이 엄청 비싸 질 테니. 라면도 먹고 싶다. 엊그제 먹은 피자나라 치킨공주도 정말 맛있었는데. 한국음식이란 그런 게 아닐까. 된장찌개보다 치킨이 더 생각난다.
한국시각 20:43
비행기를 타면 마음이 편하다. 해야하는 것들을 할 수 없다. 압박에서 벗어났다. 자유다. 그래도 비행기는 계속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아무 압박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뭔가 하지 않아도 목적지로 달리고 있다. 가면 무언가 생기겠지.
해야 하는 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하고 있으면 안정감이 온다는 걸 알았다. 내 무기력과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내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내가 빨리 되고 싶은 만큼, 그 만큼 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하면. 그러면 안정감이 올 것 같다. 그럼 하면 된다. 그러나 방해하는 것들, 이렇게 해도 이뤄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만약 그렇다면 취업시장에서 매우 불리해진다는 현실, 결국 내가 원하지 않는 스토리를 다뤄야한다는 것.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의미 있는 일보다 더 적은 연봉과 많은 근무시간으로. 내가 의미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아.. 정말이지 이런 두려움은 사람을 너무 좀먹는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불안한지도 모르고 축 쳐져있던 것이 2년 전이다. 울고불고 하며 깨닫게 된 것들이지만 사실 변한 건 없다. 해야한다는 사실과 두려움은 여전하다.
그런 두려움에 너무 오래 빠지는 것은 주변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정감으로 머물러야 한다. 그러려면 둘 중 하나. 타인에게 사랑받거나 스스로의 믿음과 노력을 사랑하거나. 이제는 후자로 넘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거라. 그리 믿고 있다.
한국시각 22:16
난 별로 말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말하는 거 엄청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특히 논하는 것, 실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 더 나은 길을 찾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만드는 것, 그것이 마땅히 그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따지고, 파고들고, 꼬투리를 잡고. 난 그런 거 좋아한다. 그런 논의가 생산적인 방향으로 흐를 때, 난 그게 너무 좋다.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굴린다. 상대방의 언어에서 관점을 얻고 다시 나의 관점에 더해 진전시킨다.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거라면 밤을 새도 좋고, 밥을 굶어도 좋고, 돈을 못 벌어도 좋다. 충분히 생산적이며 그만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요즘 내 얘기가 내 속 얘기로 파고들고 나서부터는 아무에게도 이런 말을 하질 못하겠다. 아니 사실 사람들 그런 거 다 싫어한다. 그것은 귀찮고 피곤하며 머리 아프고 괴롭다.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 혹은 너무 진지하다며 웃음거리가 된다. 언젠가부터 난 그런 것들을 꺼내지 않았고 어디다 풀지 못해 괴로워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그것 때문인 것 같다. 내 실력이 어쨌건 간에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난 평생 글러먹겠지 싶다.
한국시각 03:15
파리 드골공항까지 거의 12시간을 날아온 것 같다. 환승할 뿐인데 내가 왜 입국심사까지 기다려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환승게이트를 가기위해 입국심사를 받았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렸다. 간단히 수하물 검사를 하고 게이트를 왔다. 여기는 게이트가 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고 그 게이트마다 따로 수하물검사를 한다. 70-78 게이트 구역. 동양인은 나 밖에 없다. 난 이제 완전히 외국인이구나. 그래도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내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해줬다. 많이 오긴 하나보다.
탑승하자 맨 뒷자리 배정이었다는 걸 알았다. 여기는 따로 수하물 넣는 칸이 없단다. 싸지도 않으면서 참. 바깥은 여기도 어둑어둑하다. 파리 현지시간 19:28, 45분 출발한다. 예정보다 30분 연착이다. 기장이 오늘밤 내내 비행해야한다고 한다.
다시 코펜하겐으로 가야하고, 코펜하겐에서, 노숙한 뒤 아이슬란드를 거쳐 들어간다. 타고 가는데만 꼬박 24시간이 걸리겠지 싶다. 지금은 한국에서 출발한지 15시간째다. 이제 세개 중 하나 경유했을 뿐이다.
이런데 나오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영어를 아주 잘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