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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Feb 29. 2020

무용이 갖는 가치

달리기

~스포주의~


얼핏 포스터만 봤을 땐,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를 예상할법한 『아워 바디』는 분명 조금 색다른 한국 영화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우울한 영화이기도 했고.. 대놓고 공감과 이해를 바라지도, 뚜렷한 답을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담담한 표현 방식이 묘한 위로와 울림을 줬다.

 

주인공 '자영'은 8년 차 행정고시생이다. 그녀는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며 공부와 불확실한 미래에 전부 지쳐버린 상태이다. 어느 날 그녀 앞에 항상 동네를 달리는 '현주'가 나타난다.


우울의 반대말이 무엇일까란 질문에 사람들은 흔히들 행복이라 대답한다 한다. 우울감을 불행과 동의어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의 반대는 생동감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끝없는 무기력에 빠져있던 자영 앞에 생기 있게 달리는 현주의 모습은 생동감 자체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자영에게 현주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고, 그녀를 따라 달리기를 시작한다. 자영은 점차 현주와 가까워지며 삶의 활력을 찾아간다.


어느 날 친구 민지가 자영의 집에 찾아온다. 요새 뭐하냐는 질문에 자영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대답한다. 그러나 민지는 “그럼 그렇게 해서 뭐 강사라도 하게?”는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회사에 인턴이라도 넣어보라며 권유한다.

 

민지는 달리는 행위를 경제적 효율성 측면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자영의 현재 상황에 맞지 않는 무가치한 행동으로 인식한다. 시장 환경 속에서 모든 사물은 상품으로 간주되고, 그 영역은 인간의 행동에까지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교환가치의 높고 낮음은 화폐 아래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가격을 기반으로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는데 길들여져 있다. 모든 물건과 행위는 경제적 가치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배치되고,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 에너지, 노력, 돈,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는 효율성만이 강조된다. 이에 따라 계량화되서는 안 될 것들까지 계량화되며, 원래는 소외될 수도 없고 계량될 수도 없었던 근본 가치를 망각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며 효율성이라는 잣대만을 우선시하는 민지의 태도에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에게는 외부와 독립적이면서도 대상과 직접적으로 고유한 관계를 맺는 생활 방식이 존재한다. 아무리 시장 경제 원칙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고 자본의 힘이 강력하더라도, 분명히 팔 수 없고 교환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오히려 당장의 실용성에만 몰두하는 강박이야말로 진정으로 쓸데없는 짓이 아닐까.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고, 현재의 우리가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애초에 무언가를 정말로 즐기며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굳이 계량하려 하지 않아도 달리기로 얻은 자신감, 즉 사적 영역에의 만족은 공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행동들은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삶 그 자체에 대한 자주적 태도의 기반이 된다.


정규직 면접의 기회를 버린 날, 자영은 가족들을 데리고 비싼 레스토랑에 간다. 엄마는 당연히 됐으려니의 태도로 결과가 어찌 됐냐 묻는다. 자영은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거짓말을 한다. 그럼에도 엄마는? 자영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직장일과 동시에 다시 행시를 병행해보는 게 어떻냐고 권한다.


엄마로 대변되는 현대인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하면서,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만이 유일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저 현실에 비해 욕망이 너무 큰 것만이 문제인 것으로 인식한다. 이에 따라 모든 에너지는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쓰인다. 이들은 행동의 전제, 즉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애초에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없다. 이러한 환상을 기반으로 개인의 근본적인 불안은 가려지고 사회구조는 지탱된다.


그러나 이 모든 광적인 행위를 멈추고 잠시 생각한다면 머릿속에 한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만약 새로운 직업을 얻게 된다면, 보다 좋은 자동차를 얻게 된다면, 이런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그 다음엔?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은 진정 나 자신일까? 나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예상되며, 더욱이 그것에 도달한 순간 교묘하게 나를 속이는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일단 생기면 놀랄 만한 위력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지탱하는 기초 그 자체, 즉 그가 무엇을 바라는 가에 대해 알 것은 요구하기 때문이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시장경제 주류 사회 속 자본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결국 근본적인 질문을 맞닥뜨리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무엇인가? 목적과 수단은 전치되었고, 이제는 수단이 목적을 견제한다. 결국 돈을 쥐고도 손에는 돈밖에 남은 것이 없는 가난한 결론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자영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바라도록 ‘되어 있는’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 막연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이 진정 무엇을 바라는 가를 이해하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책임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스스로에 목표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저 불확실한 일정한 시기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단순한 일이 아닌, 어쩌면 평생 해결해나가야 할 까다롭고 무거운 문제일 것이다.


자유의 승리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 문화의 목표인 동시에 목적인 사회, 삶이 성공이나 그 밖의 어떠한 것으로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사회, 개인이 국가 또는 경제기구와 같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힘에도 종속되지 않고 조종되지 않는 사회, 마지막으로 개인의 양심이나 이상이 외부 요구의 내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것이며 그의 자아의 특성에서 생겨나는 목표를 구현하는 그런 사회로 발달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개개인이 자주성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롭고 진실된 삶은 분명, 개인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회 발달의 뒷받침을 요구한다. 이 영화는 말한다. 달리기로 해결된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원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명 자영은 전과 달리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덧붙여 자영의 <달리기>와 같이, 사람에겐 살아 숨쉬는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행동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취미의 중요성!) 꼭 주기적인 취미가 아니더라도, 쓸모없지만 즐거운 행위들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덧붙여 그것들은 수많은 유용한 행위와는 달리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해를 끼치지 않는다. 무용함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성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서, 더 나아가 스스로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최근 본 국내 영화 중에 제일 좋았던 영화! 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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