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엔걸 스즈코>와 <삽십세>
작년, 연고도 없고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단 생각이 자주 들었다.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 나아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웃고 깔깔대며 떠드는 동시에도 모든 게 의미 없고 공허하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정처없음을 말해봤자 이해할 수 있을까, 애초에 전달이 가능하기는 할까, 나아가 말해봤자 뭐가 달라질까란 생각까지 이어지며 폐쇄적인 마음이 극에 달은 시기였다. 어느 사이엔가 상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관계가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물론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닿을 1% 의 가능성조차 끊어버리는 것임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악순환의 생각회로 속에서 벗어나기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이럴 바엔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낯선 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이 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한 모든 게 정해지지 않은 혼란스러운 시기는 반대로 어떠한 선택도 가능한 가장 자유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무한의 가능성 속에서 어쩌면 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모든 게 낯설고 미지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컸다. 일단 새로운 곳으로 떠나 불가피한 상황에 스스로를 던져놓음으로써, 동기부여와 상황을 이끌어가는 힘을 얻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의 스즈코는 백만엔을 목표로 삼고 일하는 생활을 반복한다. 이 백만엔(약 천만원)은 타지에서 정착할만한 최소한의 금액으로, 그녀에겐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 그 자체가 돈을 버는 목적이다. 새로운 곳에서 일하며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점차 가까워지며 목표로 한 백만엔이 채워질 때쯤 또 다시 교집합이 없는 낯선 세계로 떠난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삼십세>의 주인공 또한 29세의 7월, 문득 이유 모를 불안을 느끼고 떠나기를 결심한다. 그는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길 꿈꾸며, 몇 해 전 자신이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게 지냈던 장소 로마로 떠난다.
얼마 동안 한 장소에서 살다 보면 사람들은 너무나 여러 모습으로, 소문 속의 모습으로 배회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주장할 권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만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뿐만 아니라 영원히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 놓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오래전부터 붙박고 살아왔던 이곳에서는 그러한 생활을 시작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는 로마에서라면 시도해 볼 수 있으리라.
그들의 시작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약일 수도, 혹은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회피일 수도 있다. 그들의 동기를 생각해보면 회피 쪽에 가깝단 생각이 들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그들의 행동을 마냥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는 그러한 입장은 전혀 고려해보지 않았으며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철저한 바운더리 밖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둘 중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이러한 선택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단 것이다. 이 빠르고 숨 막히는 도시를 영원히 벗어나고픈 생각을 많은 이들이 한 번쯤 해봤을 테지만,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대담한(혹은 무모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 또한 실제로는 한 달가량 머무른 여행으로만 그치곤 했다. 그래도 일상의 흔적이 묻지 않은 타지 생활을 통해 얻은 새로운 시선과 느낌은 그간 얽힌 생각들의 정리에 큰 도움이 됐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독립되기를 바랬던 이들의 여행은 동시에 혼란을 마주한다. 자유는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허용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형식을 해체하게 한다. 이에 따라 기존의 인습적인 견해와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에 우러나는 방식대로 나만의 새롭고 공고한 질서를 갖추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대가로 무거운 책임감과 불안 또한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자유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책임이 따른다. 이를 견디며 진정한 인간성의 발로인 적극적인 자유를 선택하거나, 이와 달리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자 외부적 권위나 내면화된 양심, 심리적 강제 등에 의탁함으로써 결정을 내리는 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부터 도피해버릴 수도 있다.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 중 ‘자유에게서 자유롭고 싶다'란 구절이 있다. 나는 항상 독립적이고 자유롭고만 싶었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모든 영향 하에서 벗어나길 바랬으며 그 어떠한 대상에도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수많은 선택을 허락하는 반면, 그에 따른 책임과 불안은 온전히 나만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러한 선택 사이에서 확신을 찾아다니며 헤매기 바빴다. 사실 지속적으로 떠나기를 반복하는 스즈코도, 결국 떠나기를 멈춘 <삼십세>의 '나'도 틀리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한 정답에 가까운 완벽한 삶은 존재하지 않으며 애초에 그러고 싶지도 않다.
사실 훨씬 젊었을 한때에 그는 꽤나 늙은 것처럼 느꼈고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은 그의 사상과 육체가 너무나 그를 심란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한창 젊었을 때 그는 일찍 죽기를 소원했고, 30세가 되고 싶다고는 조금치도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삶을 원하고 있다. 그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세계를 향해 찍을 수 있는 구두점만이 사방에서 뒤흔들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세계가 등장하는 최초의 문장이 수중에 들어오고 있다. 그 당시에 그는 무엇이든 궁극에까지 생각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도, 자기가 현실 속으로는 이제 겨우 최초의 몇 발자국을 들여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로 그 현실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궁극에까지 생각하게 허용하지 않고, 여전히 숱한 일들을 보류해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삼십세>라는 제목의 물리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이러한 고민은 20, 40, 50세에도 무관하지 않단 생각이 든다. 어떤 한 시기를 무사히 지나치고 이제는 전보다 안정적이게 되었구나란 생각이 들다가도, 기존의 세계를 뒤흔들고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건은 매번 일어난다. 삼십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또는 무엇을 확신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기는 한지 모든게 의문이기만 했던 <삼십세>의 화자는 후반부에 이르러 점차 자신에 대한 신뢰를 찾게 된다. 무슨 표현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조금씩 자신의 선택에 대해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선택 속에서도 스스로를 믿는 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맞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믿음 속에서 비로소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 진실된 삶이란 바로 그러한 확신 속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까지 스즈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몇 년 후 삼십세가 되는 해에 재독 했을 때에도 지금과 그대로일지, 아니면 또 다른 생각이 들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