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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 Apr 09. 2020

<데미안> 알을 깨뜨리고 나와 어른이 되어가는 길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만 헤세

지난달 생일에 친구에게 선물 받은 ‘데미안’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제목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몇 년 전 유명 아이돌 그룹인 BTS의 어느 뮤직비디오가 데미안을 모티브로 만들어서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는 어느 인터넷 기사 문구를 스쳐 지나가듯이 읽은 적이 있다. 그 덕에 한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던 것으로 기억하나, 읽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좀처럼 연이 닿지 않았는데 친구 덕분에 처음으로 데미안,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남자아이 싱클레어’의 내면의 갈등을 그린 지독한 성장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전반적인 내용이 주인공 내면의 갈등, 그리고 회복에 맞춰져 있으며, 끊임없이 이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온전한 한 성년으로 성장하여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어른이 된 ‘싱클레어’가 유년 시절의 자신의 모습과 상황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술되는데 중간 곳곳 아이‘싱클레어’와 중년의 된 ‘싱클레어’의 독백이 나온다. 시차를 두고 같은 상황을 다르게 설명하는 독특한 전개가 재미있다. 읽다가 이 책이 소설이 아닌 회고록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인터넷 검색을 해봤을 정도로 옆에서 누군가의 일화를 듣는 것처럼 세세한 내면독백이 포함되어있고 흡입력 있게 묘사되어있다.       

   

유명한 고전문학이라 서평과 문학평론가의 글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처음에는 데미안에 대한 서평을 열 줄 내지 정도로 짤막하게 작성하려고 하다가, 책을 다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즉 헤르만 헤세가 곳곳에 심어놓은 매개체들이 극의 분위기, 전반을 좌지우지하는 매력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분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따라서 이 글을 서평은 맞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다기보다는 부분적인 매개체들을 통해 바라본 나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세계     


싱클레어는 세상을 두 세계로 분리했다. 하나는 사랑과 철칙, 교육과 모범의 세계인 ‘우리 집’ 또 하나는 귀신 이야기와 추문, 감옥, 주정뱅이, 강도, 살인 등이 있는 ‘다른 세계’이다. 두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앞부분에 서술된 것에 의문을 품었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지?라는 생각을 중반부까지 하다가 뒤늦게 이해했다.


작품 끝까지 싱클레어는 두 세계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갈팡질팡하며 성장한다. 결국 두 세계 전부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필요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또한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양극의 세계도 사실, 각자 다른 세계 속 사람들이 아닌, 사람의 이면, 즉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면적인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두 세계에 대한 묘사 부분을 읽으며 우리 가족이 떠올랐다. 싱클레어의 가정 모습이 나의 학창 시절, 그리고 지금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한데, 싱클레어가 선과 악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며 보냈던 시절이 사실나에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야간 자율학습 도망가기, 어른들 흉내내면서 립스틱 바르기 정도이긴 하지만 악이라고 여기는 그 세계를 궁금해하는 싱클레어의 마음이 꽤 공감이 갔다. 특히 크로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죄가 탄로 날까 봐 혼자 고민하는 부분에서는 작가가 실제 경험해 봤나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되어있어서 긴장감을 줬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라사스다’     


데미안이 사라지고 난 후 발신인 표시 없는 싱클레어가 받은 편지 속 한 구절로 혼란스럽게 성장 중인 싱클레어에게 온 타이밍 좋은 편지 한 장이다.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브락사스가 무엇인지 찾는 시간, 그리고 우연히 만난 괴짜 예술가 피스토리우스의 만남은 잘 짜인 듯하게 척척 흘러갔다.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그대로 보고 믿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까지 싱클레어를 주체적인 한 성인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장치(여기서는 사람)를 계속해서 만나는 과정이 계속해서 그려진다.     


‘만약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다면 그는 영리한 지배자는 되었겠지만, 운명의 인물이 못 됐겠지’라고 말하는 친구와 악인이라고 묘사된 카인이 알고 보면 매우 강한 인물일 것이라고 말하는 데미안의 말을 듣는 데미안의 내면에서는 그간 자신이 의심 없이 보고 듣고 흡수했던 정보들이 파괴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의 기본 조건은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싱클레어는 새로운 생각의 확장을 하게 되는 계기가 이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한다.     


책 속에서는 그 과정을 알에 갇혀있던 자신이 스스로 알을 깨부수고 다시 태어난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한 번에 깨부수고 나오지 못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에서 깨어 나오려다가 멈추고 다시 깨어 부수다가 멈추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면적인 독백이 길다. 그래서 막바지에 싱클레어가 드디어 혼자 섰을 때 후련함이라는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종말의 시작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는 상황이 묘사되기에 ‘종말이 시작’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것인가 생각했는데 중의적 표현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레어는 알을 깨고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가 드디어 온전히 홀로 서는 부분이 이 제목 안의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섰을 때가 인간으로서의 종말의 시작인 것이 아닐까? 결국 탄생-죽음으로 가는 삶의 일련적 과정에서 더는 보호받지 않아도 되고, 주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독립적인 어른의 삶은 행복함도 있지만 때때로 고단하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며 슬픔의 길을 떠나는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에바 부인이 싱클레어에게 한 문장이 깊이 공감이 가서 적어본다.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지요. 새도 알을 깨고 나오려면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돌이켜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고 있나요? "



헤르만 헤세 1877. 7. 2 ~ 1962. 8. 9. 독일


데미안을 집필하기 전 이미 유명한 소설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이름을 내 걸지 않고도 과연 흥행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데미안을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이유로 초판에 발행되었던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아닌, 싱클레어 지음이라고 쓰여있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일전에 나는 그를 미치광이 내지 정신병자, 그리고 천재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4살 때 데미안의 어머니는 아이는 제가 감당이 불가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알고 나니 데미안은 어쩌면 그의 자서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내용의 특성상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각자의 출판사에서 청소년을 위해 추천하는 문학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청소년 추천 문학은 청소년기에 한번 보고 훗날 성인이 되어 다시 봐면 느끼는 점이 다르기 때문에 청소년 추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게 아닐까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책도 인생의 경험치만큼 느끼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만큼 두고두고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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