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트릭 모디아노
" '기 롤랑' 씨,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시오. 나와 함께 일을 했으면 하는데, 어떻소? "
기억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잃어버린 주인공을 향해 동업자이자 지원군인 ‘위트’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가 모여 현재의 나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는 ‘위트’의 말에 쉽게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주인공이 이 극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궁금했다.
예상대로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찾으러 나선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과거를 찾는 과정에서 조그만 실마리를 찾았다가 실망하고 또 다른 실마리를 찾았다가 실망하고를 반복한다. 그 과정 중에 기억이 부분적으로 되살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만난다.
그러나 극의 마지막에 치달을 때까지 온전한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지는 못한다. 결국 마지막 결정적인 단서를 가지고 있는 로마에 있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에 가보기로 하고 내용은 마무리가 된다.
프랑스 문학의 가장 큰 매력은 세세한 표현과 심리묘사가 아닐까 싶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게 하는 형식이 유독 많다. 이런 프랑스 문학의 특징을 어떻게 생각하면 난해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특성은 초반부에서 중반부로 넘어가면 대부분 감이 잡히며 그 후로는 술술 읽힌다.
모디아노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의 주제 특성상 주인공조차 중심이 서 있지 않은 흐릿한 사람이기에 독자들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덕분에 기억을 독자와 함께 찾아가는 느낌이 들게 한다.
맨 앞장에 ‘뤼디를 위하여', ’ 아버지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뤼디는 모디아노가 어렸을 적 열병으로 잃은 동생이며, 아버지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방랑 꾼이었다고 한다. 책과 저자의 연표를 함께 읽고나니 주인공이 기억을 잃은 시기는 모디아노가 동생을 만나고, 잃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시기와 일치한다. 여기서 모디아노가 비로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왜 동생과 아버지에게 바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작품들은 작품 속에 작가의 인생이 투영된 경우가 꽤 많다. 어느 인생의 한 부분일 수도 있고, 전반적일 수도 있다. 모디아노에게도 세계2차 대전을 겪고 동생과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정체성을 상실하고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인간의 조건이 얼마나 불확실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했고 그 내면이 책속에 녹아 있다.
결국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자신의 과거를 찾고자하는 열망이 담긴 책이지만, 그 과정에서 왜곡된 기억 속에서 하나의 다른 세계를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주인공이 모습도 볼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소설을 쓰는 형식인 건데 기억의 되살림이 아니라 창조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굳이 찾을 필요가 없는, 들추어낼 필요가 없는 과거가 존재하기도 (사실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간의 기억은 불확실함의 총체이다’라고 말하는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현재의 나와 나의 삶을 사랑하는 것' 이 가장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 됐다.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최근에 인지과학에 관심이 생겨 취미로 공부하다가 수용 전념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수용 전념에 대해 예를 들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강아지에 물린 적이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강아지를 피하고 무서워하게 된다. 피하는 것은 순간적으로는 해결이 되는 것 같지만 길게 봤을 때 오히려 ‘무서움’을 가중하게 되며 (힘든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시며 해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욱더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게 되니. 실체적인 문제를 확인하고 이해하고 맞서는 행동을 하는 것이 이롭다.라는 치료의 개념으로 그 과정은 6개로 나뉘며 그중 하나가 현재- 순간 자각이다.
언제나 초점을 현재에 두고 현재를 기준으로 세상으로 보라는 것인데, 과거의 일에 가치를 두면 현재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두운 상점들을 보고 든 생각인 ‘현재를 나와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 지어져서 생각이 들어 적어봤다. 마음이 과거에 있으면 후회되고 미래에 있으면 불안하다고 누가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도 같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이야기한다. 마주친 사람들과 나눈 길고 긴 대화, 물체를 보고 떠오른 기억들, 그리고 다른 모든 행동들.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이 합쳐지면 나중에 흡수되어 결과물이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기억을 찾아가는 추리 형식의 문학이라서 꼼꼼히 읽었는데 뭘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런 이유 없고 의미 없는 행동들이 무가치하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살아가는 것은 그냥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해석은 각자 다를 것이니 저마다의 방식으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밝은 분위기의 문학을 좋아하는 나에게 모디아노 특유의 과거, 공허, 부재와 같은 특유의 라이프 모티브는 조금 답답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지는 해석은 매력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