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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 Aug 27. 2020

<어쩌다 정신과 의사> 슬기로운 정신과 생활

팟캐스트 뇌 부자들 김지용의 정신과 이야기

몇 년째 구독하고 있는 팟캐스트 ‘뇌 부자들’의 진행자 중 한 명인 김지용 정신과 전문의가 책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뇌 부자들’ 구독자가 된 계기는 조금 특별하다. 대학 시절 의사로서 사명감 따위는 나에게 없으니 피부과 전문의로 돈을 많이 벌어 한강 뷰 집을 살 거라고 떵떵거리던 의대 졸업을 앞둔 동네 친구가 어느 날 뜬금없이 정신과 수련의로 전공을 변경한다고 선언을 하기에 의아해했던 적이 있다.


친구가 레지던트 최종 면접을 보고 온 날, 술한잔 하자는 친구의 말에 끌려나온 나는 어려운 일이 한꺼번에 닥쳐온 인생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보며 “너 처럼 밝았던 사람이 크게 힘들어할 수 있구나, 처음 보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사실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학기에 정신과 수업을 듣게 되면서 정신의학에 관심이 생겼고 불현듯 이 길이 내 길이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 지금은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도움도 줄 수 없지만, 전공을 확정 지으면서 듣게 된 팟캐스트가 있는데 들어볼래? “라며 링크를 보냈고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청취하게 된 ‘뇌 부자들’은 그 후로 몇 년간 등·하교, 출·퇴근길에 함께하곤 했다.

어느 날은 ‘뇌 부자들’을 들으며 했던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어 학술지 논문을 쓰기도 했고 인지과학을 연구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꽤 많은 도움과 길라잡이가 되어줬던 ‘뇌 부자들’이었고 많은 생각의 회로를 열어줬던 프로그램이기에 의심 없이 책을 펼쳐볼 수 있었다.


정신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의학이란 학문 안에 이렇게 다른 세계가 있다니, 객관식 세계에서 유일한 주관식 나라를 만난 느낌이었다. 신기했다. 정신과 의사는 과학자 사이의 마법사 같았다. 과학과 마법을 동시에 배우는 마법사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학문이라 어찌 보면 모호하지만, 그래서 재미있어 보였다. 심리적인 이유로 눈이 멀고 다리가 마비될 수 있다니. 그리고 그걸 상담으로 치료해낸 사람이 있다니. 진단을 내리는 과정도 복잡했지만, 같은 진단명이라도 사람마다 발병 원인, 나타나는 증상, 심리, 치료 방법까지 모두 달랐다. 질병이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인생을 더 넓게 바라봐야 했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니, 이 길이라면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33~34p-

빅 데이터 시대답게 요즘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다중매체를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 지식마저 다품종 소량생산 양상이 가능해진 요즘. 대학원생과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연구는 누가 먼저 해놓았다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데 ’ 뇌 부자들‘이 세상에 소개되었던 2016년만 해도 정신의학에 대한 정신과 의사들의 허심탄회한 방송이나 도서는 극히 드물었다. 원하는 정보를 찾기도 어려웠고 특히나 한국어로 된 문서는 더욱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사람이 정신의학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기도 하거니와 나조차도 정신병은 ‘사회악’이다 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음지에 있는 무서운 존재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뇌 부자들 멤버 허규형은 한 환자에게 계속 바보라고 놀림받기도 했다. 사실은 내가 조금 더 바보였는데, 그저 그 환자의 담당 의사가 아니었던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다. -P65


그러나 비슷한 주제의 도서는 있었다. 베스트셀러인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모건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대표적인 예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정신의학 분야의 책으로 두 책의 가장 큰 공통점은 글을 쓰는 이는 의사이지만 초점은 ‘환자’에 맞춰져 있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환자를 치료한다- 이럴 땐 이런 방법, 저럴 땐 저런 방법을 쓰니 좋더라- 와 같은 연구보고서이자 임상 보고서 형식인 책은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사적인 의견 개입은 없었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을 두고 사견을 얹어 설명하기도 하고 어떨 땐 자신이 환자와 유사하게 겪었던 경험을 의사 입장에서 듣는 ‘뇌 부자들’는 신선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김지용의 ‘어쩌다 정신과 의사’는 초점을 ‘환자’에게만 맞추지 않고 의사인 ‘나’에게 맞춰서 쓰인 이전과는 다른 각도의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정신과 의사가 어떤 사람인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정신과 의사는, 어쩌면 당신의 기대를 배반할지도 모른다. 삶의 나락에 빠진 누군가를 척척 구원해내고, 마음의 모든 문제에 마법처럼 해결책을 제시하는 ‘산꼭대기의 현자’ 같은 정신과 의사는 이 책에 없다. 나를 비롯해 내가 아는 동료들은 다른 모든 이처럼 자기 인생의 산길을 오르다 헤매기도 하는 사람이다. 대신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헤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웠고, 또 꾸준히 공부한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인생의 방향을 잃고 힘들어하는 사람의 길을 함께 고민하며 찾는 가이드다. 그렇게 가이드로 살아가면서 내가 겪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 그때 느낀 감정들을 이 책에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33P


치료를 이끌어 나갈 만한 힘 있는 전문가처럼 보이기 위해서 낮은 목소리, 위엄 있는 말투, 아무리 바쁘더라도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했던 일, 난폭한 행동을 보이는 환자를 말로써 제압했던 일, 혹은 제압에 실패해서 흠뻑 두들겨 맞았던 일, 아끼던 환자가 세상을 떠나버린 일과 가끔은 자신도 환자가 먹는 약을 복용하기도 하며 1+1=2라는 명제가 적용되지 않는 세계이기에 아직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것과 그로 인한 좌절,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니 자책을 하게 된다는 솔직한 이야기도 담겨있다.


다 읽고 보니 평생 내 것으로 가져갈 도움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무의식의 방어기제는 실로 놀랍다는 것, 적당히 좋은 사람 되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관계 맺음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기,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언제나 현대 정신의학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지금 여기 (Here and Now)에 살기와 같은 것들 말이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던 나에게 오랜만에 건강한 책이 와줬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과 이 책을 읽을 사람 모두 각각 처한 상황과 배경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잘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안다. 아무리 정신없이 바쁘더라도 자신을 챙겨가며,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이 원하는 각자의 모습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책 속의 한 단락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책을 많이 읽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혹시 스스로의 부족한 면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된다. 고백하건대 그들이 꼽은 그 ‘부족한 면’이 단점이 아닐때가 많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글의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가보려고, 남의 마음을 이해하력, 나와 남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미 충분히 좋은 사람이다. -2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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