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날씨와 계절이 있다. 꽃이 피며 괜히 마음이 설레는 봄부터 추워도 하얀 눈이 세상 전체를 감싸주는 것 같은 겨울까지. 더욱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각자 선호하는 여행 가기 좋은 계절도 있을 것이다. 이동이나 관광이 편안한 봄이나 가을 날씨의 온화한 계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다수일 테지만, 나는 예전부터 쨍한 태양과 바다를 사랑해서 여름에 떠나는 여행을 가장 좋아했다.
내게 이런 여름을 상징하는 여행지가 바로 바르셀로나다. 처음 바르셀로나로 떠났던 여행도 무더운 한여름의 중간이었다. 보통 내가 여행을 결정하고 준비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내가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내 첫 해외여행 동행은 당시 만나던 여자 친구였다. 처음으로 연인과 여행을 간다니 그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회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회 초년차에 여행을 가기 위해 8월에 출발하는 여행을 4월부터 회사에 미리 양해를 구한 뒤 항공권을 예약하고 떠나는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하루 순탄하게 잘 준비해서 행복하게 다녀온 여행이라면 아마 이번 글의 소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여행을 2개월 정도 앞둔 6월 초에 크게 다투고 이별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헤어짐이 물론 가장 슬펐지만, 솔직히 준비해온 여행은 어쩌지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을 정도로 여행이 가고 싶었다. 긴 시간 준비하면서 이미 모든 예약을 다 마쳤기에 여러 예약 건들을 취소하는 것도 부담이었고, 힘들게 뺀 휴가 일정을 날리게 되는 것도 매우 고통스러웠다. 헤어진 상태에서 중도에 한번 연락을 해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는데, 은연중 상대방이 여행을 포기해주길 바라는 느낌으로 전혀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 8월 여행 당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고,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솔직히 이때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얘도 여행을 가기로 해서 만나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그 상황을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해봤으니 말이다. 그리고 탑승 시간이 다되어 게이트로 이동하다가 그녀를 딱하고 마주치게 되었다. 이별 통보를 당한(?) 입장이라서 만나면 '화가 나지 않을까', '붙잡고 싶을까', '어색하지 않을까' 등등 별의별 생각들을 다했었는데 실제로 맞닥뜨리니 그냥 웃음만 나왔다. 첫째는 헤어지고도 이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고 기어코 여행을 가겠다고 나온 서로의 모습이 정말 웃겼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투고 헤어진 지 시간이 꽤 흘러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도 그리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와~ 너 진짜 이 여행 가려고 했니? 나 차 놓고?"
"아 나는 진짜 휴가 겨우 뺐다고, 첫 유럽이라고. 그러는 너는 그렇게 가고 싶던?"
"와 뻔뻔한 거 봐 대박"
"사돈 남 말하고 있네"
서로에 대한 약간(?)의 힐난과 질책이 잠시 이어졌고, 이후에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헤어진 연인의 동행이라는 매우 기묘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헤어짐을 준비하는 연인이 이별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헤어진 연인이 함께하는 여행이라니, 이거 무슨 할리우드인가?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필요에 따라 따로 또 같이 느낌으로 진행이 되었다. 각자 자신이 구상한 코스에서 혼자는 조금 힘든 일정이면 부분 동행으로 함께 했고, 서로 취향이 맞지 않았던 관광지들은 각자 알아서 구경을 하였다. 솔직하게 그렇게 함께하면서 다시 조금씩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로맨틱한 도시에서, 어쨌든 뜨겁게 좋아했던 서로가 다시 함께 하고 있으니, 순간순간 헤어졌다는 사실을 잊기도 했고, 또 그래서 혼자 다닐 때면 헤어졌다는 것이 다시 실감 나 더 외롭고 서글프기도 했던 정말 기묘한 여행이었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스틸 컷
그리고 그때의 우리만큼이나 기묘한 관계의 주인공들의 바르셀로나 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 바로 우디 앨런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다.
(+ 긴 사설이 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일단 소개하기에 앞서 꼭 짚고 넘어갈 2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나는 감독 우디 앨런의 사생활과 가정사 문제다. 영화라는 예술은 감독과 작품을 떼어놓기 어려운 감독이 너무나 작품 감상에 많은 영향을 주는 예술이고, 그의 사생활 문제는 솔직히 실드 치기 어려울 만큼 도덕적 지탄을 받을 소지가 굉장히 많아서, 유죄로 밝혀진 내용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소재로 다루기가 상당히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화 로케이션 여행에서 우디 앨런의 작품들 '미드나잇 인 파리(2012)', '블루 재스민(2013)',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20)'을 빼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결코 그의 사생활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또 하나 짚고 가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 제목의 번역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원제는 'Vicky Christina Barcelona'로 말 그대로 영화의 두 주인공인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바르셀로나에서의 경험을 의미하는 중립적인 제목인데, 이를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영화 전체 내용에서 심히 벗어나는 불륜 막장 드라마 제목을 가져와 어그로를 끌었던 배급사는 정말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라는 가장 친한 미국인 친구 둘이 바르셀로나 여행과 여행 중 만나게 되는 관계를 주요 소재로 그리고 있다. 성격이 완전히 반대인 두 친구는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정말 매력적인 화가 후안(하비에르 바르뎀)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후 이 관계는 삼각관계가 되었다가, 또 비키의 약혼남이 등장해 4각 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다시 후안의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까지 등장하며 더 기묘한 다각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잠깐의 일탈이었을까? 결론적으로는 모든 관계가 끝이 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누가 우디 앨런의 영화 아니랄까 봐 바르셀로나 풀 로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영화의 영상미를 끌어올리고 중요한 배경 요소로 활용한다. 파크 구엘, 까사밀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 바르셀로나가 사랑하는 가우디의 대표 건축물들은 물론이고, 호안 미로 미술관, 시우타델라 공원, 티비다보 놀이공원 등 도시 유명 관광지들을 거의 다 다루고 있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스틸 컷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묘했던 관계가 결국엔 그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끝이 났듯이, '여행을 함께하는 헤어진 연인'이라는 나의 기묘한 관계도 영화에도 나온 로케이션 중 하나인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에서 끝이 났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 그녀와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한 곳인 '몬주익 마법의 분수'를 함께 방문했다.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 - 몬주익 분수 - 에스파냐 광장은 쭉 이어지는 하나의 장소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을 지는 에스파냐 광장, 즐거운 음악이 연주되는 분수 쇼, 그 광경을 즐기고 있는 많은 관광객들의 흥겨운 이야기 소리, 무더운 한여름 낮을 지나 해가 지며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분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 계단에 앉아 이 비정상적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을 누리다 보니 역설적으로 우리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은 지금이고, 그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다시는 이런 순간이 올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바르셀로나에서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하나의 여름이 끝이 났다.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과 몬주익 분수(출처: 내 인스타)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영화 추천 포인트>
1) 극 중 등장하는 세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 레베카 홀, 페넬로페 크루즈와 극의 중심을 잡는 하비에르 바르뎀까지. 자칫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영화 속 기묘한 관계를 네 사람의 연기와 비주얼이 이야기에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바르셀로나 여행 추천 포인트>
1) 세계적인 관광지라 워낙 여행을 즐기는 다양한 방법들이 잘 소개되어있어 특별히 더하고 싶은 내용이 많지는 않다. 보통 한국인이라면 가우디 투어로 주요 가우디 관광지들을 여행하는데, 개인적으로 가우디 투어를 하는 것에 더해서 각각의 가우디 건축물들에서 하는 여름 이벤트들에 꼭 참여하는 것을 매우 권장한다. 까사 밀라에서는 여름밤 옥상에서 레이저 쇼를 진행하고, 까사 바트요에서는 와인과 함께 재즈 나잇을 즐길 수 있다. 매우 인기가 많은 코스들이므로 여행 가기 전 꼭 사전에 신청을 하고 체험해보길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