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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이 Sep 25. 2022

추억의 동음이의어, 서점

최근 본 영화 속 서점 장면들

나는 서점이라는 공간을 참 좋아한다. 브런치에 글을 쓰거나 찾아와 글을 읽는 분들은 말 그래도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일 테니, 아마 이 부분에서는 모두 깊은 공감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예전처럼 책을 많이 읽지 않고, 특히나 최근에는 활자보다 영상 매체들을 더 많이 접하고, 그나마 읽는 글들은 다 디지털이 되어 브런치나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을 보는 경우가 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점은 내가 사랑하는 공간이다. 삶에서 조용한 평화가 필요할 때면, 퇴근길 영풍문고에 들러 단 30분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책을 읽고 집으로 간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내가 살던 경북 안동 시내에는 '교학사'라는 서점이 있었다.(지금도 있다!) 지금은 다른 곳들이 개발되며 도심이 이동했지만 내 학창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도시의 가장 번화가 중심에 서점이 있었고, 그 사실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나는 외곽지역에 살았으므로 한 달에 한번 정도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갈 일이 있었고, 교학사에서 책을 읽고 바로 앞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하나를 먹는 것은 그 시절 내게 매우 행복한 일이었다. 서울로 상경을 한 뒤에도 그랬다. 학교를 다니며 신촌에서 누군가를 만날 일이 생기면 항상 홍익문고에서 짬을 내어 책을 읽으며 만날 사람을 기다렸다. 그곳에서 소개팅을 하기로 한 상대를 기다리기도 했고, 이별한 연인을 다시 만난 적도 있다. 그 크지 않은 공간에 정말 많은 추억들이 있어, 내가 복학을 하고 얼마 안 가 홍익문고가 폐점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내 추억의 장소가 인고의 세월을 굳건히 버텨줬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서점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서점 특유의 고요하면서도 응축된 것 같은 에너지와 그 특유의 분위기, 많은 책들이 주는 종이와 책 냄새(!), 특별한 미감을 더하지 않더라도 책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인테리어. 모두 다 좋지만 역시나 서점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서점이란 공간에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모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책 중에 일본의 저널리스트 시미즈 레이나가 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책이 있다. 제목 그대로 저자가 방문해본 전 세계의 아름다운 서점 20곳을 소개해주는 글인데, 아직 내가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던 시절 내 여행의 꿈을 강하게 자극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 로케이션 여행을 브런치에 글로 남기고자 했을 때도 참고했던 책이기도 한데, 내 추억이 남아있는 공간을 타인에게 소개해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 공간을 찾아가 행복감을 느낀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 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영화 속 한번 찾아가 보면 좋을 영화 속 서점 장면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이 분야 끝판왕들인 '노팅힐(1999)'의 Notting Hill Book Shop이나 '비포 선셋(2004)'의 Shakespeare And Company, '이터널 선샤인(2004)'의 Barnes and Noble 등 당장 떠오르는 서점 장면들이 많은데, 오늘은 내가 최근에 본 영화들로 국한해 3편의 영화 속 서점 장면을 뽑았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지난 2주 간 본 영화들에 서점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어서 놀랐다. 이번에는 나도 다 가보지 못했던 곳들이라 글을 쓰며 정리하면서 새로운 추억이 남아있는 서점이 되기를 기원하며 다음 여행 버킷 리스트로 올려두려고 한다.




1) '더 건지 리터라티 앤드 포테이토 필 파이 소사이어티(2018)'의 FOYLES

일단 영화 제목 길이 무엇. 이 영화의 주연 배우 릴리 제임스가 출연한 '맘마미아2', '베이비 드라이버',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등의 작품들을 다 좋아해서 넷플릭스를 통해 릴리 제임스 영화가 오픈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굉장히 기대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정말 다른 이유 없이 제목 때문에 영화가 보고 싶지 않아져서 묵혀두었다가 독서 모임을 떠올리게 하는 한 사람을 알게 되어 갑자기 영화가 생각나 최근에야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원제를 살리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건 좀... 어쨌든 이하 편의를 위해 '북클럽'이라고 글에서는 지칭하겠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작은 섬 '건지'에서 힘든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섬 주민들이 만든 북클럽이 있고, 작가인 주인공 줄리엣(릴리 제임스)이 자신의 책으로 전쟁의 고통을 위안삼아 버텼다는 섬사람들의 편지를 받아 그곳에 충동적으로 방문하게 되면서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의 플롯은 크게 2가지로 나치 점령 당시 책을 통한 연대를 통해 버텨냈던 건지 섬 북클럽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 친구에게 청혼을 받았지만 아직 자기 자신만의 꿈은 찾지 못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그려진다. 특히나 영화의 소재가 북클럽인만큼 영화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책을 매개로 공감하고, 연대하고, 소통하는 등장인물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영화다.


'더 건지 리터라티 앤드 포테이토 필 파이 소사이어티'의 스틸 컷(FOYLES 서점)


영화가 시대극인 만큼 영화 속 촬영지들은 다 시대적으로 연출된 공간들이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설령 존재하는 촬영지라고 해서 방문하더라도 영화에서 받은 감흥을 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다. 나도 이런 걱정으로 이 영화에 등장한 서점 FOYLES를 찾았다.


놀랍게도 이 서점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었는데, 런던 107 Charing Cross Road에 있는 영국 문학에 있어 랜드마크 같은 서점이라고 한다. 실제로 100년이 넘은 서점으로 Foyles 형제들에 의해 1906년 이 거리에 세워진 뒤 1929년 같은 거리의 113~119번지로 이전해 영국 전후 문학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도 하며, 2014년 현재의 위치 107번지로 이전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영화 속 연출 장면이 아니더라도 100년이 넘은 역사적 서점으로서 방문해볼 가치가 충분히 큰 서점인 것이다. 영화 속 FOYLES 서점은 플롯 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이 아니고 배경으로 살짝 스쳐가는 로케이션에 가깝지만, 그래도 책을 소재로 한 시대극 영화에서 배경으로 활용되는 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특히 짧은 시퀀스에도 옛 서점의 아름다움이 물씬 나는 분위기로 잘 연출되어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어느 날, 사랑이 걸어왔다(2010)' The WORDSHARERS BOOKSTORE

이사하고 쓰게 된 유플러스 TV에서 우연하게 발견하게 된 영화 '어느 날, 사랑이 걸어왔다'. 앞서 소개한 '북클럽'이 제목 때문에 보기 싫었던 영화라면, 순전히 이 영화는 제목 때문에 갑자기 보게 되었다. 영화는 상처 투성이의 남녀 주인공, 우연하면서도 운명적인 만남, 거기다 재즈 음악까지 로맨틱한 요소들을 적당히 잘 버무린 로맨틱 드라마 장르 영화로 명작이나 수작이라고 할 순 없지만 딱 쌀쌀해지는 가을에 마음을 꽁기꽁기하게 만드는 전형적이면서도 괜찮은 로맨스 영화였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내 조세핀이 죽은 후 그녀와의 첫 만남의 추억이 있는 허름한 모텔방에서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재즈 뮤지션인 주인공 샘(루퍼트 프렌드)에게 어느 날 문득 의문의 소녀 파이(클레멘스 포스)가 그의 방을 찾아와 화장실 문을 잠그고 갑자기 목소리를 들려달라는 아주 기묘한 첫 만남을 하게 된다. 파이도 자신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4년 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상처를 갖고 있고, 둘은 화장실 문을 사이로 두고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들려주고,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면서 서로가 가진 상처들을 치유해주며 사랑을 하게 된다.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던 샘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고, 이후에는 파이에게 노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백미다.


'어느 날, 사랑이 걸어왔다'의 스틸 컷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서점의 이름은 The WORDSHARERS BOOKSTORE다. 가격이 따로 없고 손님이 책과 LP에 가격을 붙이는 특이한 서점이자 주인공 샘의 직장이 바로 이곳이다. 아내가 죽은 후 폐인 생활로 우울함에 빠져 정상적인 관리를 하지 못하자 서점은 매출이 줄어들고, 샘은 실직의 위기에 놓이는데 이 상황을 알게 된 파이의 도움으로 서점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된다. 영화 장면 속 서점에 흐르는 재즈 음악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한번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이 영화는 공개된 정보가 거의 없어서 구글링으로 열심히 찾은 결과, 캐나다 Winnipeg에서 풀 로케이션으로 촬영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둘의 모텔 장면은 2135 Halifax Street의 아파트에서, 영화 속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인 재즈 클럽은 Hamilton Street의 The Distrikt Nightclub이라는 것까진 알게 되었는데, 이 서점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했다. 서점의 외부 장면에서 나온 서점 이름인 WORDSHARERS는 영화에서 사용한 임의의 명칭인 것 같은데, 경험 상 이 장면이 세트 연출일 것 같지는 않아서 캐나다 위니펙에 가게 된다면 직접 거리를 나서 이 서점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3)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 Norli Bookshop Universitetsgata

가장 최근인 바로 어제 본 따끈따끈한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코로나 이후에 마스크 쓰고 관람을 하는 것이 너무나 불편해서 영화관 자체를 간지가 정말 오래되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영화관에 방문해 본 영화가 바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다. 우선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그분에게 감사를 전한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에 앞서 선입견으로 인한 걱정과 염려들이 조금 있었다. 감독인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 중 내가 보았던 영화는 '델마(2017)'였는데, 사실 그 영화는 시각적인 연출이나 내용이 나에겐 좀 자극적이고 잘 맞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이 영화도 사전에 내용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목만 보니 또다시 자극적이고 고어한 내용의 영화가 아닐까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한 내 선입견이었고, 이 영화는 제목과 다르게 내 기준에서는 정말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 연애 소설 같은 영화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찾지 못해 직업을 마치 옷 갈아입듯이 바꾸는 주인공 율리에(레나스 레인스베)가 서른이 되며 겪은 두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로, 왜 제목에 최악이라고 하는지도 잘 모를 만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영화를 굉장히 재미있게 봐서 이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모든 지면을 다 쓸 것 같아 영화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 컷


오슬로 풀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도시 오슬로가 정말 아름답게 그려지는데, 그 이유를 찾아보니 이 영화 자체가 오슬로라는 도시에 바치는 감독 요아킴 트리에의 헌사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가 '리프라이즈(2006)', '오슬로, 8월 31일(2011)',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이어지는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관련해 요아킴 트리에의 인터뷰 중 오슬로에 대한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 발췌해 소개한다.


I love that sense of specificity of a place in movies [...] For a filmmaker, it’s a cinematic gift to have a place that you know intimately, that you can film and show to an audience. Oslo is exactly this to me. - 요아킴 트리에

 

이러니 영화 속 오슬로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어쨌든 이 아름다운 도시 오슬로의 한 공간으로 Norli 서점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서점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돌던 주인공 울리에가 그 과도기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공간이자, 자신의 새로운 사랑과 재회하는 공간으로 스칸디나비아 최대 서점 체인인 Norli의 대학가점(?)이라고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며 매우 모던하면서 실용적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이 된 이 서점은 다른 영화 속 인상적인 로케이션들에 비해 공간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율리에가 재회하게 된 새로운 사랑의 남자를 먼저 발견하고 당황하는 모습, 그리고 그 남자 주인공이 다시 율리에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처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의 설렘이 연기로 잘 드러나고 그 뚝딱거림이 특히나 나에게 공감이 되어 인상적인 시퀀스가 되었다.




굳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진부한 표어를 쓰지 않더라도, 올해 가을은 나에게 다시 책을 읽게 만드는 특별한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책을 읽게 만드는 공간, 책을 읽게 만드는 영화, 책을 읽게 만드는 계절 그리고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 잃어버렸던 독서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모두에게 감사를, 이번 가을 서점에서 행복한 추억을 쌓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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