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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이 Sep 30. 2022

다음 중 기차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1번) 로맨스 / 2번) 좀비

중학교 3학년 때였나 2학년 때였나.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쨌든 그즈음 가출을 한 적이 있다. 가정 불화나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 같은 원인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광고가 하나 있었다. KT 광고인가 그랬는데 ]기차 칸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을 보는 여자에게 남자가 헌팅(?)을 하는 그런 내용의 CF였고, 나름 공전의 히트를 친 CF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2병 사춘기 시절, 문학 소년을 자부하던 내가 때마침 읽던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고, 때마침 듣고 있던 노래가 '춘천 가는 기차'였고, 때마침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가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춘천 가는 기차가 타고 싶었을 뿐이다. CF에 나오는 그 주인공들처럼. (지금 생각해도 너무 중2병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때는 그랬다.) 한 푼 두 푼 모은 용돈을 가지고 안동에서 춘천에 가기 위한 기차를 탔다. 그날의 소동이 다 기억나진 않는데, 내가 가출을 했다는 소식이 학교에 퍼지고, 부모님 귀에 들어가고, 나는 춘천까지 가지도 못한 채 청량리에서 놀다가 잡혔던 것 같다. 어디 말하긴 부끄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춘기에나 할 수 있는 낭만이 있는 추억이라고도 생각한다.


어쨌든 그때부터였나, 가을의 기차는 나에게 낭만적인 이미지의 로망이 되었다. 이런 나의 기차에 대한 낭만을 폭발시키는 영화가 있었으니 다들 생각하시는 바로 그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6)'다. ('비포 선라이즈'에 대한 영화 로케이션 여행은 나중에 따로 쓰겠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효율을 중요하게 여겨서 기차를 교통편 선택지로 고르는 경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행만 가게 되면 기차를 타며 로맨스를 꿈꾸기 시작했던 것이. 물론 이 로맨스는 단 한 번도 현실에서 이뤄진 적이 없다. 우선 기차에서 말을 걸어볼 비슷한 나이 대의 이성 분과 같이 앉아본 적이 없고,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말도 걸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조금 생각을 바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을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 지역의 기차를 함께 타보고 싶다는 것으로 버킷리스트를 수정하였다. 


어쨌든 이런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보니 나는 가을이 되면 기차가 생각나고, 기차가 생각나면 로맨스가 떠오른다. 그런데 나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 국적 불문하고 생각보다 많은 영화에서 기차에서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 이전에도 기차에서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몇 편의 고전 영화가 있으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낭만이란 것이 역시나 비슷하긴 한가보다. 그래서 오늘은 기차라는 로케이션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피어나는 로맨스를 다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들을 몇 편 추천해보려고 한다. 




1) <모던 러브>. S2.E3 'Strangers on a (Dublin) Train(2021)'

아마존 프라임에서 공개된 TV 시리즈 '모던 러브' 시즌2 세 번째 에피소드인 'Stragners on a (Dublin) Train'. 한국 사람은 사랑하지만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음악 영화계의 거장(?) 존 카니가 직접 제작, 각본, 연출을 맡아 출연한 에피소드가 바로 'Stragners on a (Dublin) Train'이다. '원스(2007)', '비긴 어게인(2014)', '싱 스트리트(2016)' 등 그가 연출한 음악 영화 모두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나로서는 아마존 프라임 구독을 처음 신청해서라도 꼭 찾아봐야만 했던 작품.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제목 그대로 더블린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낯선 두 남녀가 서로에게 반하게 되고, 기차에서 내리며 연락처 교환 없이 약속한 어느 시점에 더블린 역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락 다운으로 더블린 역으로 갈 수 없게 되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TV 에피소드라 짧은 플레이 타임(35분)으로 존 카니가 기존에 연출한 영화들에 비해 큰 감흥을 느끼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할만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Stragners on a (Dublin) Train'의 스틸 컷


첫 번째 장점은 <모던 러브> TV 시리즈가 갖는 강점이기도 한데 이 시리즈는 전체 에피소드들이 뉴욕 타임스의 'True Love Stoies'에 실린 실제 사랑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 스토리가 실화라고 하면 뭔가 영화적으로 부족한 것 같았던 결말이나 내용 전개들도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아니 이게 실화란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더 영화 같은 현실이 큰 감흥을 주는 전개들이 있다. 특히나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두 주인공이 인사하는 방법이나, 락다운으로 만날 수 없게 된 상황 등이 실제 러브스토리와 맞물려 매우 공감이 된다. 두 번째 장점은 그냥 나만의 장점일 수 있는데, 이 작품의 여주인공 파올라를 맡은 배우가 루시 보인턴인데 루시 보인턴은 존 카니 전작 '싱 스트리트'의 여주인공 라피나 역을 맡기도 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배우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이 작품에서도 그렇게 그려져 남자 주인공에 이입하기 좋았다. 이 외에도 <모던 러브> 시리즈는 TV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시즌 1에서는 앤 해서웨이가 주인공을 맡는 에피소드 등 훌륭하고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들이 다수 등장해 그것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한 추천 TV 시리즈다.


2) '너에게 가는 열차(2020)' 

기억에 코로나가 터지고 얼마 안돼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고, 하필 코로나 때문에 터키 여행을 떠나려다 못 가게 된 상황에서 본 영화라 못 떠난 여행의 아쉬움을 달래줘서 굉장히 재밌게 봤던 영화다. 영화적으로 훌륭하다거나, 대중성이 있어 성공한 영화도 아니다. 영화 플롯 자체도 우연히 같은 객실에서 함께가 가게 된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끌리다는 내용으로 '비포 선라이즈'를 배경만 터키로 옮겼을 뿐 독창성이 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영화다. 그래도 극을 끌어가는 두 터키 배우가 무척 매력적이고, 적절하게 사용되는 OST가 상당히 좋고, 난생처음 보는 이즈미르 지역으로 떠나는 기차에서 터키 풍경이 참 아름다워서 영화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너에게 가는 열차' 스틸 컷


이 영화가 그래도 '비포 선라이즈'와 다른 점은 남녀 주인공이 (스포가 되는) 과거가 어떤 비밀로 엮여있다는 점이고, 그 비밀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인데, 사실 영화를 보고 나면 굳이 있어야 할 이야기였나 하는 생각은 든다. 내 기준 불필요해 보이는 정사 장면이나 마지막 결말 장면도 아쉬운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절에 터키의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는 기분으로 보기에는 좋은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청불 작품이고 조금 진한 정사 장면이 나오니 후방주의.


3) '그날의 분위기(2016)'

오랜만에 소개하는 한국 영화 '그날의 분위기'. 전국 관객 65만 명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고, 비평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한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영화 로케이션(KTX)을 여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에 소개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영화다. 사랑의 시작은 처음 두 사람이 만난 '그날의 분위기'가 좌우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KTX에서 만난 두 주인공 재현(유연석)과 수정(문채원)이 밀당을 하고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보내는 24시간을 그리고 있다. 


'그날의 분위기'


당시에도 여성 혐오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보면 영화의 설정이나 대사 등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작중 구도인 유혹을 위해 작업을 하는 남자와 시종일관 그걸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애인이 있는 여자라는 둘의 관계도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좀 불편하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스토리를 공감하면서 보기는 힘들고, 말 그대로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작품인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뒤늦게 진실된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도 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배우 유연석과 문채원의 연기는 상당히 괜찮고, 시각적으로 상당히 어울리는 그림의 조합이라서, 이성 간의 밀고 당기는 특유의 분위기는 잘 살아있는 작품. 여러모로 KTX 배경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추천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4) '6번 칸(2021)'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알게 된 영화 '6번 칸'. 러시아 영화인지 핀란드 영화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할리우드이 아닌 영화 변방(?)에서 만들어진 특색 있는 느낌을 그대로 강점으로 가지고 온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또한 시놉시스를 단순화하면 무르만스크행 대륙 열차 6번 칸에서 만난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와 러시아인 광부 '료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소개한 세편의 영화와는 근원적으로 완전히 다른 주제의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로맨스라고 말하며 이 범주에 넣기에는 조금 애매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기에 꼭 소개를 하는 것이 맞는 작품이란 생각도 든다.


'6번 칸'의 스틸 컷


애초에 주인공인 라우라는 레즈비언이고, 둘이 나누는 대화나 행동 등을 비춰보았을 때 둘의 교감을 로맨스로 이해하기보다는 보다 넓은 틀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교감이나 우정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적합한 것처럼 여겨진다. 로맨스보다는 휴머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칸에서도 소개된 작품이라 좋은 영화 평론들이 있으니 영화에 대한 내용은 그런 아티클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러시아의 대륙 열차라는 소재가 잘 활용되고 있고, 중간 기착지 등도 북반구 북쪽의 추위가 일상인 지역들의 각박한 특유의 이미지도 잘 차용해 영화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적극 일조한다. 이런 환경에서도 피어나는 따뜻한 인간애(?)가 돋보이는 작품.




앞서 말한 것처럼 나에게 기차라는 공간은 낭만 그 자체의 공간이다. 이렇게 많은 영화에서도 로맨스의 배경 장소로 연출되었고, 협소한 공간에서 낯선 두 사람이 장시간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설정은 앞으로도 더 많은 영화에 소재로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설국열차(2013)'나 '부산행(2016)' 같은 기차에 대한 내 환상을 멋지게 산산조각 내는 훌륭한 작품들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기차 하면 로맨스를 꿈꾸고 싶다. 


심심하니까 다들 한 번씩 생각해보자. 부산 가는 KTX에서 좀비를 만날 확률과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을 만날 확률 중 무엇이 더 높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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