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와 선택에 대해
고의로 유리를 깨 본 적이 있나? 며칠 전 어쩔 줄 모르는 감정에 휩싸여 향초를 냅다 벽에 던졌다. 물론 혼자 살고 있는 자취방이었고, 나 혼자인 상태였다. 타인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니 안심하시길. 향초가 벽에 부딪혀 왕장창 깨지고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후련한 마음이라기 보단 이성의 끈을 이성으로 놓아버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이게 끝이 아니다. 식탁 위에 보이는 유리컵까지 깨고 나서야 행동을 멈추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유리조각을 치웠던 청소기까지 고장 나 13만 원을 주고 청소기까지 구매했다.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정말 입을 꾹 다물고 유리조각을 주워 담는데, 내가 보기에도 스스로가 처량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자업자득.
그날 밤 친구에게 이 사실을 전하니 친구가 호탕하게 웃으며 한 미국 드라마 이야기를 해주었다. 스트레스에 쌓인 주부들이 보호장구를 쓰고는 독방에서 유리를 박살 내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너도 13만 원짜리 화를 냈다고 생각하라며 심플한 위로를 건네더라.
그래서 난 왜 유리를 깼을까? 바야흐로 3개월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두고는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는 다큐멘터리 지원사업에 공모했지만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3개월 전만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었는데, 그 마음이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참 바다와도 같더라. 잔잔하고 평화로웠다가도 거센 파도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린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이름은 시게루. 바다 마을에 살며 아버지를 따라 청소용역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시게루에 눈에 띈 부러진 서핑보드. 시게루는 버려진 서핑보드를 주워다가 어설프게 고치고는 바다로 향한다.
바다로 걸어가는 길, 시게루의 친구들이 그를 부른다. 소리를 친다. 하지만 시게루에게는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게루는 귀가 들리지 않는 농아다. 말을 하지도 못한다. 어설프게 고친 서핑보드를 들고, 티셔츠 한 장 걸치고는 바다로 뛰어든 시게루.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주인공 시게루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질주하지도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시게루가 발견하게 되는 부러진 서핑보드. 시게루는 잠시 망설인다. 청소용역 트럭은 시게루를 태우고 서핑보드를 지나치지만 얼마 안가 시게루는 트럭에서 내려 서핑보드를 챙긴다. 이로써 시게루는 서핑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보드를 고쳤으며, 바다로 향했다.
영화는 시게루가 서핑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유가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누구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 것들의 합이라고 이야기한다. 선택은 중요한 것이고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꼭 선택에 이런 끙하는 마음만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일상을 지나쳐오다 무언가 발견되는 순간, 마음속에 누군가 속삭이듯 이러면 어떨까 하고 말해주는 순간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나는 이 순간을 마주할 때 그저 '때가 된 것뿐'이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정말 조용한 영화다. 시게루는 반복적으로 서핑을 타고, 비슷한 장면이 이어지며, 대사보다는 음악이 흐르는 영화다. 조용히, 시게루를 일상을 지켜보게 만든다. 시게루는 그저 매일매일 서핑을 하고, 넘어지기를 반복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열정, 도전, 실패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시게루가 농인인 것이 어떤 위기의 서사로 귀결되거나 장애물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 여름, 조용한 바다>는 타자화하지 않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메시지가 없어 보이지만 그 자체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첫 번째 서핑대회에 나갔을 때 시게루는 실격당한다. 자신의 차례를 호명했지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운 일이지만 시게루는 대회에 상을 타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대회가 끝난 바다 위에서 시게루는 자신과 약속인 듯 그저 서핑보드를 탈뿐이다. 두 번째 서핑대회를 나갔을 때 어느새 시게루 옆에는 친구들이 있다. 동네 바닷가에서 서핑하는 시게루를 지켜보던 서핑 동아리 학생들이다.
이제 시게루에게는 월급을 모아 장만한 새로운 서핑보드도 있다. 시게루를 응원하는 사장님이 건네준 서핑복 덕분에 더 이상 달랑 티셔츠 한 장을 걸치고서 서핑보드를 타지도 않는다. 서핑보드를 발견한 소년의 일상은 이제 바뀌었다.
기타노 다케시가 연출한 세 번째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하나비>, <기쿠로지의 여름> 등으로도 유명한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희극인, 영화배우다. 폭력 장면이 많은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 중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기쿠로지의 여름>은 다른 결의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여름의 장면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평화롭게 담았다는 것. 여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해는 가장 길어지고, 몸은 늘어지며, 한 장의 바람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계절. 무언가를 시작해도 늦지 않고, 끝내기에는 아쉬운 계절.
올해 어떤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도전 자체에 매몰되지는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하자. 그저 스스로에게 어떤 때가 다가온 것이라고. 나 같은 바보처럼 유리를 깨고 새 청소기는 장만하지 말고. 그리고 만약 당신의 앞에 무언가가 눈에 띈다면 오래도록 그걸 보고 있도록 하자. 시게루가 서핑보드를 발견한 것처럼. 그럼 당신의 인생이 생각보다 많이 바뀌어지지 않을까? 물론 좋은 쪽으로.
뉴스레터 어거스트에 발행된 글을 재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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