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없는 조울증은 없다
사실 K군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저를 많이 닮은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K군의 모습과 행적은 생각보다 과거의 저를 많이 반영한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K군과 제 모습이 똑같이 겹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K군은 저의 경험과 상상력이 적당히 버무려져 만들어진 인물인 셈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분께서는 K군이 조울증을 겪은 과정을 따라오셨겠지요. 저 또한 글을 쓰면서 그의 조울증 여정을 함께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K군이 겪는 에피소드들을 진행하면서 과거의 제 모습과 겹쳐 생각할 때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안타깝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한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K군이 저를 반영한 캐릭터라고 미리 말씀드린 이상, 민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빙 돌려서 하는 제 고백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K군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조울증을 계속 경계하고 관리하며 살게 될 K군은, 누군가에겐 조금 불행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에게는 무척이나 닮고 싶었던 이상형에 가깝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마음이 들게 만든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과거의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도 글로 써 나갔습니다. 저도 이제는 제법 많이 알게 된 조울증의 여러 면을 K군도 알아 가기를, 그래서 이 병을 잘 헤쳐 나가기를 기대하고, 바람대로 잘 풀려 나갔을 때 대리 만족하는 마음이었다고 할까요? 그런 기대에 맞게, 결과적으로 K군은 조울증 환자로서 나름대로 꽤 괜찮은 치료 경과를 보인 편이고, 병식도 확실합니다. 조울증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생활 습관도 잘 지킵니다. K군의 현실판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제 자신도, 이렇게 한 두 번 시행착오 정도로 괜찮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현실의 저는 K군보다 훨씬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 끝에 겨우 병을 관리하는 요령을 알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조금씩 더 배워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조울증은 생각보다 공부가 많이 필요한 병이라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제가 K군 이야기를 쓰면서 제일 그가 부러웠던 점이 그의 인복(人福)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을 ‘인복’이라 부르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하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K군에게 조언을 해 주고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는 좋은 지인이 있습니다. K군에게는 ‘귀인’이라 해도 좋을 조언자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완전한 가상의 인물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실 세계의 저에게 이런 역할을 해 준 친구는 없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조울증을 겪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봤습니다. 게다가 조울증에 관한 사전 지식도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었겠지! 이런 희망사항을 담아서 K군에게는 친구를 하나 붙여 주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친구는 K군의 우울증이 심각한 상태까지 갔을 때 거기서 벗어나고 다시 병을 올바르게 관리하는 길로 돌아오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께서 조언자 친구 역할을 해 주실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없다면 더 좋겠지만, 이 책의 처음 부분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변에 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혹시 주위에 평소에 알고 지내던 것과 갑자기 다른 사람인 것 같이 말과 행동을 하는 분이 계시지 않나요? 물론 그것만 가지고 조울증임을 단정할 수는 없고, 당연히 전문의의 진료를 통해야만 합니다. 조심스러운 문제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만약 K군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지인이 있다면, 특히 그 지인이 가족이라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경우 인내심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면 실제로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렇다면 내버려 두지 마시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도와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골든 타임을 놓치지 말고 최대한 빨리 발견해서 진단하는 것이 조울증을 치료할 때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 조울증이란 병을 되도록 덜 힘들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런 독자분도 계실까요? K군처럼(또는 저처럼) 이미 조울증 당사자로서 사건 사고를 많이 겪은 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궁금합니다. 이 글이 조증과 우울증 때 있었던 에피소드들에 대한 충분한 핑곗거리를 제공해 드렸을까요? 각 장의 제목들이 조증이나 우울증 상태를 설명하는 비유들의 목록이지요. 애초에 이런 비유들을 궁리한 것은 조울증 때문에 한없이 낮아진 저의 자존감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조금씩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조울증에 관해 설명하는 방법들을 발견하고,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중 몇몇 예시들을 상당히 궁색하거나 억지스럽다고 하신다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면이 있는 설명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설명들을 포함해서 이 책의 조증과 우울증 설명 방식은 저 스스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울증에 대한 핑계들은 사실 ‘조울증을 이해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해의 틀이 필요한 것은 조울증이라는 병이 개인적 사건으로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고, 학문적으로도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가능한 방법으로 납득하려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입니다. 물론 조울증에 대해 과학적으로 아주 많은 것이 밝혀져 비유적인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가 된다면 더 좋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 조울증 당사자이신 독자 여러분께도 이 핑계들이 단순히 ‘변명’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좋은 도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당사자가 아닌 분께서 조울증을 알아보고자 하실 때도 이 글의 설명을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K군의 이야기는 결국 어떻게 될까요? 결과적으로 K군은 그대로 쭉 병을 잘 관리하며 잘 지냅니다. 친구와 가족들이 지켜보고 조언해 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약도 점점 줄여서 나중에는 약물 치료 없이도 안정된 상태를 잘 유지하게 됩니다. 조증과 우울증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해피엔딩입니다! 흥미로운 반전을 기대하셨다면 조금 죄송합니다.
그런데 K군의 헤피엔딩 스토리와 조울증 당사자의 현실은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자주 언급했지만, 조울증은 재발하기 쉬운 병입니다. 심지어 약을 끊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재발의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고 꾸준하게 수면의 질을 관리하는 것은 매일 계속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그렇게 해도 재발할 가능성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계절 변화의 영향으로, 또는 학교나 회사에서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아서, 낮밤이 바뀌는 업무 때문에 수면 시간이 일정하지 못해서 등, 현실에서 부딪히는 이유로 재발할 수 있기 때문에,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것이 조울증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기분 변화를 자기 스스로, 또 가까운 사람이 모니터링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주 번거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편이, 조증이나 우울증의 재발을 겪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특히 조증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게 되면 두 팔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두 팔은 짐을 들고 있는 것 밖에 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조울증을 짐짝처럼 대하면 삶이 조울증에 매몰되어 다른 일은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그래서 조울증을 예방하는 생활 방식을 일상적인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일단 습관이 되면 바꾸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왕이면 조울증 재발을 예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좋은 습관들을 만들어 봅시다. 그런 좋은 습관들이 하나 둘 모이면, 조울증을 무거운 짐이 아니라 몸에 잘 맞는 옷처럼 입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조울증을 입고 가는 새로운 여행을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조울증 당사자, 가족, 지인 모두 이 여행을 안전하게, 끝까지, 그리고 함께 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