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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Aug 24. 2023

수 많은 의미, 수 많은 위로

story 4. 실비아, 당신에겐 이 길이 어떠한 의미이길래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수 많은 의미들을 위하여,
Salud!

2019.10.15 (07:40) Zubiri - Pamplona (15:30) (22.8km)


Zubiri에서 Pamplona로 향하던 숲길

하루종일 숲의 향을 맡으며 걸었다. 천사가 향수를 뿌린다면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덩달아 싱그러워지는 마음에 오늘 아침에도 잠깐 울었다. 카미노는 너무도 쉽게, 모든 풍경으로 내 마음을 열어젖혔다. 감동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어 처음엔 이게 무슨 느낌인지 낯설기만 했다. 어색한 감정에 스스로 눈치를 살피다 크게 부푼 내 동공을 마주쳤다. 아, 이 기분은 감동이구나. 그 마음이 벅차서 눈물이 나는 거구나. 나는 여태껏 왜 이런 기분을 모르고 살아야만 했을까. 난 이렇게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아름다운 풍경에 눈물을 묻힐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어제의 카미노를 함께한 로버트와 다른 일행 (셸럿과 리노) 들에게 오늘은 혼자 걷겠다고 했다. 생각이 많아져서 (는 사실 핑계고, 독일인인 그들은 어떠한 이유에선지 끊임없이 속도감 있는 대화를 나눴다. 영어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하다고 자부했던 나조차 혀를 내두르는 어휘력에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Sorry, Robert.) 혼자 생각하며 길을 걸으니,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조차 생각하게 된다.  숲길을 지나, 마을을 지나,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길을 걸었다. 힘들다. 확실히 힘들다.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계속 걸을 뿐이다. 길 앞에, 한없이 경건하고 겸손해진다.

팜플로나로 가는 길


10월인데도 유럽의 태양은 무시할 수 없다. 뜨거웠던 한 낮의 날씨에 물에 빠지고 싶었던 생각만 강렬히 났던 기억.
Ricardo가 찍어준 사진. 잔잔한 길을 따라 걸었다.

어제는 길을 걷다 서핑보드를 등에 진 남자를 만났다. 'Pray 4 suffer' 제 몸뚱이보다 큰 서핑보드에 적혀있는 글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에겐 서핑보드가 십자가 같은 의미일까. 조심스럽게 추측했었다. (우리는 그를 '서퍼맨'이라 불렀다.) Pamplona에 도착한 후, 구경이나 할 겸 주변을 둘러보다 들어간 매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짊어지고 있던 보드가 없다. '네 서핑보드 어디 갔어?', 매장 앞에 내려 둔 서핑보드를 가리키며 말한다. 'Here, Suffer doesn't leave me yet'. 아, 고통은 아직 당신을 떠나지 않았군요.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밤을 함께한 실비아 발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실비아는 스페인 사람으로, 실로 아름다운 미소를 가졌다.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녀는 직장에 휴가를 얻을 때마다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다.) 버벅거리는 스페인어로 겨우 연유를 물으니 답하는 그녀. '의사말로는 뼈가 조금 부러진 것 같대.' 오늘 아침 내 야외용 방석을 건넸다. '걷다가 쉬면서 써', (실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목욕탕 방석'으로 쓰이는 그것을 그녀는 알 도리가 없고, 나의 스페인어는 누군가의 이해를 산출할만한 능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피고 앉아 버벅거리는 몸짓으로 시늉을 보여야만 했다.) 그녀는 고맙다며 나를 껴안았다. 절뚝이는 발로 나보다 빨리 걸었다. 실비아, 당신에겐 이 길이 무슨 의미이길래. 감히 이해하려들지 않았다.


너무나도 다른,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카미노의 또 다른 매력이다. 길을 걸으며 마주칠 때 인사하는 ¡Buen Camino! 에, 이 길을 통해, 또 이 길을 걸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여정이 더욱 값지길 바란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Buen Camino.

팜플로나에 도착해서 허기를 채웠던 타파스. 맛이 기가막혔다. (먹다가 스티브한테 딱걸림.)
나의 옆자리는 어제 마주쳤던 러시아인 키도. 남여 불문, 태초의 자유로 돌아가 헐벗고 다니는 알베르게. 덕분에 속옷을 편하게 말릴 수 있다.
Question 4. 스페인 음식은 입에 맞아? 오늘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뭐야?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스페인 음식 따위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에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의 업적을 돌아보자면 점심과 저녁 모든 접시를 깨끗이 -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비웠다. 버섯과 함께였던 또르띠야도 맛있었고, 맥주는 두 말할 것도 없다. 생수보다 싼 맥주라니,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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