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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Aug 26. 2023

혼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story 5. 꺾인 발목은 부푼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이 모든 행위는
온 우주에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2019.10.16 (08:00) Pamplona-Puenta de Reina (17:00) (23km)


희망찬 아침이었다. 부쩍 쌀쌀해지긴 했어도 얇은 조끼를 걸치니 괜찮았고 붉은 흙빛의 건물 사이로 동이 트고 있었다.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에,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행운까지 조화로운 아침이었다. Pamplona는 순례길을 걷는 중 만날 수 있는 도시들 중 비교적 큰 편이었기 때문에 한참을 걸어 차도와 건물들을 빠져나와야 했다.

Pamplona의 아침, 한 길로만 차들이 줄을 서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출근길인가 보다.

오늘은 23km의 일정으로, 뻬르돈 (perdon) 고개를 넘는다. Alto del Perdon이라 불리는 이곳은 '용서의 고개'라고 불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용서의 고개라는 곳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살아오며 자신의 무익함을 반성하는 곳, 혹은 타인의 해함을 용서하는 곳. 신에게 자신의 죄악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곳. 어쩌면 이 상징 속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온 우주에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좌) 오늘 걷게될 길의 표지판. 페르돈 고개를 넘는다. (우)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운


(좌) 스타일이 멋졌던 프랑스 할머니. 성격도 호탕했던 그녀는 코골이 또한 그랬다. (우) 표시석 위 나의 신발

 도시를 조금 벗어나니 다시금 탁 트인 벌판이 나온다. 작고 가는 길을 따라 배낭을 멘 순례자들이 종종거리며 걸어간다.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걸으니 고개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하고 곧 패르돈 고개에 다다랐다.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실로 장관이었는데, 사진을 몇 장 찍고 고개를 내려오다 발목을 접었다. 딱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질 않더라. '아 씨발. 망했다' 왜 그, 나쁜 말인걸 알면서도 그것 외엔 설명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있질 않은가.

(좌) 패르돈 고개 위 철제 조형물 (우) 접지르고 내려오는 길이 온통 이따구의 돌밭이라 더 힘들었다.

발목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발목까지 모두 감싸주는 중등산화를 신고서 접질려버렸으니 제법 큰 뒤틀림이었던 모양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덜렁거리진 않으니 부러지진 않았나 보다, 하고 절뚝거리며 걸었는데 뒤뚱거리며 걷는 나를 보고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냐 묻더니 Perdon 고개의 악명을 설명해 주고는 자신의 스틱을 내어주고, 파스를 뿌려주었다. '아, Perdon고개가 뭔 용서 어쩌고가 아니고 내 발목 가져가서 미안하다는 거였구나.'라고 오전에 생각했던 성스럽고 고귀한 인간의 본질 따위를 얼버무려버렸다.

(좌)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둘렀던 붕대. (우) 스티브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했던 저녁


Puenta la Reina에 도착하니 저녁 5시다. 본래 23km 정도면 3-4시쯤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절뚝거리다 보니 늦어버렸다. Pamplona에서부터 Puenta la Reina까지가 23km, 그리고 이후에 나오는 제법 큰 도시는 Estella까지 또다시 23km 거리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이 도시에서 쉬어가는 듯했다. 그래서 첫 날 만났던 Robert와 Steve, 그들과 함께 동행자가 된 친구들까지 소개를 받고 저녁을 함께했다. 접질려진 나의 발목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 Steve는 내가 걱정되는 눈치였는데, 괜스레 내 마음이 착잡할까 봐 그랬는지 'Perdon 고개에 발목 두고 온 애'라며 놀려댔다.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에 우리는 다 같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전생에 지은 죄가 너무 많아 발목을 희생물로 바쳤다면서.

조가비를 의미하는 순례길의 상징

 내일이 되면 분명 더 부어오르겠지. 못 걷기야 하겠냐. 다리를 절면서라도 가다 보면 도착하겠지.


Question 5. 사람들은 어때? 좀 사귀었어?

Absolutely. 모두, 영어도 완벽하지 못한 나에게 어찌나 그렇게 잘해주는지. (Ricardo said "You Should Delet that" 리까르도가 나의 일기를 훔쳐 듣고 선 이 말은 지워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Steve, Lee (오늘 만났는데,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독일청년 Robert, 발목이 삐었을 때 선뜻 자신의 스틱을 내어준 Morgan, 그녀의 친구 Jil. 서핑보드를 등에 지고 다니는 Suffer board man. 그의 아들과 딸. 이탈리아 심장과 의사 가브리엘, 셸럿과 리노. (이 둘은 영어로 상대하기 조금 힘들다.) 다리뼈가 부러져도 계속 걷는 실비아. 그녀의 아버지. 기억나는 모두가, 모두 무시무시하게 착하다. 저들은 어떠한 독기로 Camino를 걷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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