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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May 06. 2024

작디작은 마음들과

story 10.  마주하는 커다란 세상들에 대하여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 주는
그것은 따듯한 등불이었으니

2019.10.21 (8:00) Navarrete - Azofra (15:20) (22km)


혼곤한 정신으로 잠에서 깼다. 내 몸을 뉘인 곳이 어디인가 무거운 눈을 껌뻑거리기만 했다. 이층짜리 침대의 하얀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있는 처지를 깨닫고는 푸욱, 하고 숨이 절로 빠져나갔다. 꿈을 꿨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떫은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멀쩡한 한쪽 발목으로 무게를 실어 침대 사다리를 콩콩 거리고 내려왔다. 먼저 나설 채비를 마친 순례자들이 알베르게의 작은 부엌 안에서 음식을 나누며 오근자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달짝지근한 음식냄새와 커피 향이 섞여 공기가 푸근히 데워져 있었다. 잠깐 함께 앉을까 하다가 오늘의 행선지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뚜렷한 목적 없는 나는 길을 잃을 것 같아 인사를 뒤로하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현관문으로 나서는 길에 마주 본 신발장을 잠깐 바라봤다. 각자의 발걸음으로 각기 다른 여정에 도달하게 될 작은 작디작은 신발들. 신발 안에 가득 담긴 각자의 거대한 세상들.

각자의 발걸음으로 각기 다른 여정에 도달하게 될 작디작은 신발들.

알베르게 바로 맞은편 카페가 일찍이 문을 열어 에스프레소 한 잔과 크로와상을 사 먹고 길에 올랐다. 모닝커피로 채운 카페인의 위력인지, 비축해 놓았던 어제의 체력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발걸음이 가벼워 꽤 속도가 났다. 파란 날이었다. 낮게 깔린 무해한 구름 위로 높은 하늘이 창창했다. 추수가 끝난 들녘의 흙빛 사이로 미처 시들지 않은 풀들이 줄을 지어, 마른풀과 진풀이 층층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탁 트인 시야에 눈을 둘 곳을 잃어 발 밑만 종종거리고 걸었다.

푸른 하늘 밑으로 추수를 마친 들녘이 층층이 쌓여있었다.
왼쪽 편 멀리 보이는 마을, Alesón

계속 걷다가 Najera에 도착할 때 즈음 히카르도와 키도, 예린씨를 만났다. 히카르도는 역시나 어디서 따왔는지 모를 포도를 건네며 살긋이 웃었다. 한아름 쥐어진 포도의 가지 마디를 꺾어 키도와 예린씨에게 건네자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내가 오기 전 이미 한차례 포도를 해치운 모양이었다. 분명 지나오는 길에 있던 이름 모를 와이너리에서 따 왔을 터라 양심의 가책을 묻혀 따져 물으니, 히카르도는 순례길을 따라 위치한 와이너리들은 종종 길가의 포도들을 순례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남겨놓는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한차례 수확이 끝나고도 남아있는 포도를 따온 것이라고.


믿거나 말거나 한 일이었지만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겨우 내 감나무 우듬지에 남겨둔 열매를 나눠먹는 까치가 된 꼴이 아닌가. 실하게 여문 포도를 부러 남겨두었을 마음을 생각했다. 공연히 마음이 간지러웠다. 송수권 시인의 까치밥만 속으로 되뇌며 까악, 까악 했다.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그것은 따듯한 등불이었으니... 그것은 따듯한 등불이었으니...' 무엇보다 한 입 털어 넣은 포도 알맹이들이 다디달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산티아고까지, 581km

금방 한송이의 포도를 해치우니 달큼한 향이 잔잔히 남아 입맛이 돋았다. Najera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Tapas로 배를 채웠다. 시름없는 언덕이 흘연히 우뚝했다. 그 늑골을 따라 붉은 흙빛의 퇴적층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동이 틀 무렵에 켜마다 선명히 비추는 장관을 보고 싶었는데 Najera까지는 고작 16.9km 되는 지점이기도 하고 조금 더 걷고 싶은 마음에 다시금 길에 올랐다. 아, Najera라는 마을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Najera의 골목길

5km를 좀 더 걸어 Azofra에 도착했다. 알베르게가 하나뿐인 작은 마을이다. 숙소에 짐을 두고 개운히 씻었다. 마땅한 식당이 없어 음식을 해먹을 생각으로 장을 보러 나갔다. 지도에서 찾아 간 '슈퍼마켓'은 그보단 동네 구멍가게에 가까워 보였다. 녹슨 미닫이 문을 사이에 두고 물건이 잔뜩 들어차있어 사이를 베집고 들어가야 했는데, 가격표는 고사하고 유통기한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 사이에 늙은 노파가 무심히 앉아있었다. 먼지 쌓인 물건들을 골라내 파스타면과 베이컨, 껍질채 붙어있는 마늘 구근을 샀다. 물건을 들이밀며 'Hola' 했더니 노파의 얼굴이 환하게 구겨졌다. 찬찬히 물건을 살피고는 'dos euros y cincuenta' 했다. 계산을 하고 'Gracias'라고 말하니 그녀도 똑같이 말했다.


마을을 조금 둘러보려 했는데 작은 광장 외에 딱히 향할 곳이 없어 숙소로 돌아왔다. 잠깐 스트레칭을 하고 여유를 가지다 같이 방을 쓰는 프랑스 여인 파비엔과 함께 빵과 샐러드를 나눠먹었다.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그녀와 프랑스어는 '봉주르'밖에 모르는 나로 인해 우리는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었으나, 합리적으로 소통을 멈추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따금씩 눈이 마주치면 싱겁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좌) 2.5€와 노동의 합작품, (우) '아, 소주먹고 싶다' 하던 사진.

이른 저녁으로 마늘과 베이컨을 잔뜩 썰어 넣고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먹었다. 그런대로 맛은 있었지만 매일마다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자니 떡볶이 생각이 물밀듯 몰려왔다. 아니 것보단 소주 생각이 간절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멍하니 다리를 풀고 매콤한 음식들을 생각했다. 얼큰한 닭볶음탕과 달짝지근한 떡볶이, 김치찌개… 따끈한 음식들 생각이 절실히 생각나는 것을 보니 날이 추워지긴 했나 보다. 내일은 옷을 좀 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음식 생각을 떨쳐보려 했다.

벽에 그려져 있던 Camino 표시

어제 푹 쉰 탓인지, 어렵지 않았던 날이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리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자기 전 눈을 감고 다음날 행선지에 대해 고민했다. 'Sto domingo de la calzada (15km)에는 제법 큰 중국인 마트가 있다고 했다. 날이 많이 추워졌으니 장갑이나 방한복 같은 것들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듣기로는 신라면을 판다고도 했다. Grañon (22km)로 가면 아마도 히카르도를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22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채울 수 있다. 22km는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거리긴 하지만, Sto domingo de la calzada에서 빨리 도착한 후에 돌아다닐 체력이 있을 때 물건을 사는 것이 좋은 생각일 수 있다… 고개를 털고 어깨에 힘을 뺀다. 뭐든 내일이 되어보면 알겠지. 잠에 든다. Bune camino.


Question 10. 포기하고 싶어?

절대로 아니.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상사한테 깨질 때 뺨을 후려치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절대로 실제로 옮기지 않을 걸 알기에 하는 상상일 뿐이다. 절대로 포기는 안 할 것 같다. 워싱턴에서 온 패디는 걷다 넘어져 팔이 부러졌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다니엘라는 올리브를 먹다 씨를 씹어 이가 부러졌는데도 걷는다. 실비아는 발목뼈가 부러졌는데도 걷는다. 서퍼보드 맨은 서핑보드를 등에 업고 걷는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고통을 안고 걷는다. 누구와의 고통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걷는데 내가 힘들어하는 것들이 대수인가, 하는 위로를 얻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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