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은 꼬리를 물고 온다. 일단 뮌헨의 날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따듯하다. 2월 중순의 온도가 13도까지 오른다고 하면 포근하다고 봐야겠지. 세 번째 척추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이다. 매일 저녁마다 꼭 통화를 하는 분이 나의 새시어머니 힐더가드시다. 레겐스부르크에 사신다. 보통은 내가 전화를 드린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왓츠앱을 보내시며 밤마다 내가 통증 없이 잘 잤는지를 걱정하신다. 그런 문자를 받을 때마다 울컥한다. 친정 엄마의 문자를 받은 것처럼.
실제로는 한국의 친정 엄마는 이 모든 사실을 모르신다. 내가 작년여름 한국에 다녀온 후로 세 번이나 척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 엄마는 올해 82세가 되셨다. 작년 겨울에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골목에 나가셨다가 미끄러지셔서 갈비뼈에 금이 간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석 달을 누워만 계신 후로 근육이 많이 소실되어 약해지셨다. 작년여름 한국에 나갔을 때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살이 많이 빠지시고 여위어지셔서 마음이 아팠다. 그런 엄마를 더 힘들게 만들 수는 없다고 언니가 말씀을 안 드렸다. 나 역시 동의했다.
그날은 내가 완화병동에서 암병동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오후 내내 병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등짝을 드러내고 햇볕 치료를 받았다. 오후 5시가 되자 해가 물러났다. 날씨가 푸근하니 산책을 나가자는 생각이들었다. 누군가 보호자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 시간에 보호자를 찾기란 애매했다. 남편은 점심때 다녀갔고 아이는 다음날 들를 예정이었다. 저녁이 배달될 시간이라 한갓졌다. 그런 시간엔 의사도 찾아오지 않는다. 간호사에게 양해를 구해 혼자 내려갔다.
나는 아직 빠르게 걷질 못한다. 마음은 날아가는데 현실 몸은 누가 쫓아온대도 도망을 갈 수 없을 정도로 느리다. 좌우 균형도 조금 잃었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이나 잔디밭은 바닥이 고르지 못해 넘어질까 봐 자신이 없을 정도다. 양 발목과 종아리에 근육이 빠져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건 발끝서기를 해보면 안다. 그게 안 된다. 그걸 알았을 때의 황당함이란. 다행히 허벅지나 엉덩이 힘은 조금 남아있는지 혼자 보행이 가능한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뒤뜰을 세 바퀴를 돌았다.
멋진 하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30분 산책을 하고 벤치에 앉아 쉬었다. 얼마나 기분이 상쾌하던지. 오후 5시 30분. 아직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6시까지 올라가면 될 거 같았다. 힐더가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지만 암병동으로 온 걸 누구보다 기뻐해 주실 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누가 들으면 친정 엄마라고 믿을 정도다. 언어만 빼면 말이다. 그때였다. 어머니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날리셨다.
"너희 언니가 독일로 와서 2-3주라도 널 도와주면 안 될까? 혹시 일 때문에 오기 힘드니? 내가 비행기표는 사 줄 수 있는데..."
놀랐다.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날 염려하고 계실 줄이야! 거기다 저렇게 관대한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이야!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감사해요 어머니. 저희 언니는 일 뿐만 아니고 여러모로 상황이 힘들답니다. 엄마도 약해지셨고, 형부도 간암으로 투병 중이거든요. 2주마다 복수도 빼러 가야 하는데 병원이 집에서 좀 멀어서 언니가 동행을 해야 해요. 혼자선 힘들거든요. 하지만 그 제안에 대해선 너무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어머니는 아쉬워하시면서도 흔쾌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셨다. 2년 전 코로나 때 내가 첫 항암을 했을 때였다. 언니는 그때 모든 일을 던져놓고 달려와서 5개월 간 내 항암을 도와주었다.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우리 집의 모든 일과 내 항암에 올인했다. 그런 우리 언니를 두고 당시 우리 남편이 이런 멘트를 날린 적이 있다. 자기가 살면서 살아있는 사람 중에 이렇게 헌신적인 사람은 자기 눈으로 직접 처음 본다고.
언니는 그랬다. 아침 6시에 조카 도시락 싸서 학교 보내고, 나와 남편 아침을 준비하고, 오전에 집 청소에 빨래 돌려놓고, 장 보고 점심 준비. 그 사이 나는 오전과 오후 산책을 가게 하고, 오후에 조카가 돌아오면 점심 준비에 우리들 점심 준비까지하고. 그리고 또 저녁이 오면 저녁을 준비하고 밤 9시에 부엌을 윤이 나게 싹싹 닦고 정리하고 밤 10시에는 내가 잠을 잘 자도록 발마사지를 해주었다. 매일 언니는 내가 잠이 들어서야 자러 갔다.
푸른 하늘.
언니는 5개월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형부 건강이 안 좋아져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형부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서 간암 진단을 받았고, 그 길로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이날 이때까지 형부 투병을 옆에서 돕고 있다. 언니가 쓰러지지 않는 게 차라리 놀라울 정도다. 작년여름 한국에 갔을 때 언니가 번아웃 증세란 걸 알았다. 젊은 날부터 가지고 있던 깊은 우울과 불면증에 대해서도. 지난가을 언니는 즉시 치료를 받았다.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처방을 받고 나서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고, 아침마다 방바닥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힘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 힘든 시간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견뎌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후로 나는 함부로 언니를 부르지 못한다. 언니는 일도 하고 있다. 우리 언니는 요가와 명상을 지도한다. 코로나 3년을 언니만 기다려 준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나는그런 우리 언니가 자랑스럽다. 내가 독일에서 우리 언니 같은 요가와 명상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나는 암에 걸리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우리 언니는 그런 사람이다. 나이팅게일. 천사표. 내가 우리 언니 같은 사람과 쌍둥이로 태어난 건 축복이다.
다음날 지나가는 말로 카더라 비슷하게 힐더가드 어머니의 말씀을 톡으로 전했더니 당장 오겠다는 우리 언니. 에구머니나, 그렇게 빨리 반응할 줄은 몰랐다. 온다고? 온단다! 가능하다고? 가능하단다!형부가 양해를 해 준 것이다. 동생한테 한번 다녀오라고. 그사이 친정 엄마는 자기가 돌보고 있겠노라고. 요가나 명상 수업도 임시 대타 강사를 구해놓고 오면 된다고. 언니가 오면 나야 좋지! 내 항암 때는 일만 하고 갔는데 이번에는 좀 쉬면서 놀면서 하고, 뮌헨 시내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같이 산책도 자주 가고. 얼마나 좋겠나! 그리고 좋으면 또 오면 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요일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드디어 집에 간다. 그리고 언니가 온다. 좋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