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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2. 2023

3인4각, 발맞춰 뛰어 볼까요?

흔히 번역, 그중에서도 출판 번역은 혼자 일하는 고독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일단 출판 번역을 하려면 우선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있어야 하고, 그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가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번역문을 다듬고 매만지는 편집자가 있어야 한다. 그 셋 가운데에 누구 하나만 빠져도 책은 번역서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올 수 없다. 일종의 3인 4각 같은 관계라고 해야 하나. 


물론 번역 자체는 번역가 혼자서 해야 하니 때로는 외롭고 또 때로는 지루한 작업이긴 하다. 하지만 책이 반드시 다른 이들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번역 작업이 고독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번역 에이전시와 함께 일을 할 때 운이 좋아서였는지 중국의 베스트셀러 소설 하나를 번역한 적이 있었다. 처음 그 단편 소설 모음집을 번역할 때만 해도 책은 중국에서 200만 권이 조금 넘게 팔린 책이었다. 물론 200만 권만 해도 베스트셀러인 것은 분명했지만 몇 년 뒤 그 책은 엄청난 메가 히트작의 주인공이 됐다. 


사랑과 친구, 가족 등의 사랑 이야기를 짧은 에세이처럼 쓴 50여 편의 단편 소설이 담긴 책은 작가의 트렌디하고 감성적인 글솜씨 덕에 많은 중국 젊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성 작가이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감성을 자극하는 그의 여성스러운 글귀들 곳곳에 눈이 머물렀다. 요즘 말로 ‘인스타 감성’에 맞는 예쁘고 공감이 가는 글귀들이 정말 한 문장 건너 한 번씩 나올 정도였다. 


또한 남성과 여성의 정서를 동시에 절묘하게 담아낸 작가의 재능에 나는 번역가로서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묵직한 주제나 깊이는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잠자리에서 한두 편씩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되면 좋겠다는 머리말 속 작가의 바람은 차고 넘치게 구현된 책이었다. 비록 샘플 번역 테스트를 통과해 맡은 책이었으나 나는 금세 작가에게 애정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이 작가님의 작품을 온전하고 아름답게 우리말로 옮겨 내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됐다. ‘작가님의 고운 소녀 감성과 자유롭고 제멋대로의 개성이 함께 살아 있는 이 소설들을 내가 우리말로 고스란히 옮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까지 하며 나름 혼신의 힘을 쏟아 번역을 마친 그 책은 황당하게도 당시에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책이 안 나온다고요? 왜요?” 

“번역하고 보니까 책이 출판사에서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네요. 제작비 비싸게 들이느니 그냥 번역료만 버리고 말겠다는 건가 봐요.” 

“혹시… 제 번역이 마음에 안 드셨대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가끔 번역을 하고도 출판사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책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유난히 기대가 컸던 그 책의 출간이 불발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척이나 속이 상했었다. ‘번역도 다 했는데 책을 출간하지 않는다고? 베스트셀러에, 분명 한국 독자들도 좋아할 만한 감성인데 출판사 사장님 안목이 이상한 거 아냐?’ 당시의 경험이 너무 아쉬웠던 나는 그런 책을 번역했는데 출간이 안 되어 아쉽다는 이야기를 주변에 가끔 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뒤, 한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번역가님께서 A란 소설의 번역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저희 출판사에서 그 책의 출판 저작권을 양도받아서 출간을 하려고 하거든요. 혹시 저희가 번역가님 번역 원고를 그대로 써도 괜찮을까요?” 

“아, 그 책을 출간하신다고요? 안 그래도 작가님 글이 참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나올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몇 년 사이에 그 책은 중국에서 700만 권이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되어 있었다. 애정을 갖고 있던 작가님의 책이 내 번역으로 책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뿐만 아니라 내가 번역한 책인데 나오지 않아 아쉽다고 주위에 했던 말이 출판사 귀에까지 들어가 결국 번역가로 내 이름을 올리게 된 것도 참 신기했다. 여러모로 그 작가님의 소설은 나와 끈끈한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 사이에 책이 중국에서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던 터라 새롭게 추가된 원고가 있어 그 분량만큼 다시 번역을 해야 했다. 물론 몇 년을 묵혀 뒀던 번역 원고를 새로이 손보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단편 소설 모음이라 어떤 이야기는 중국 특유의 분위기가 많이 나는 것도 있어요. 독자들이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전부 번역해 주시면 상의를 해서 삭제할 부분은 삭제하고, 작가님 동의를 얻어 수정할 부분은 수정하죠.” 

“예,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혹시 책 표지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책의 원래 표지도 예쁘기는 한데 한국 정서에 맞게 새로 일러스트 작가님께 맡길 예정이에요. 시안이 나오면 보여 드릴게요.”

“20, 30대 여성들이 주요 독자층이 될 테니까 거기에 맞는 예쁜 표지가 나오면 좋겠네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해서 표지랑 책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내지 구성도 좀 더 심플하고 예쁘게 할 예정이고요.” 

“와, 그럼 독자들이 읽으실 때 훨씬 좋아하시겠네요.”


번역 원고를 넘긴 뒤 편집을 하고 책의 디자인과 표지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담당 편집자와 종종 연락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작가님과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지만 애정을 갖고 그분의 작품을 우리말로 온전히 옮기려 노력하고, 편집자와 사소한 부분까지 상의하며 글을 가다듬고 책을 완성시켜 갔더니 그 결과물은 ‘만족’이란 두 글자로 내게 선물처럼 돌아왔다. 이후에 그 책은 중국에서 1천만 권을 훌쩍 넘게 판매한 초대형 히트작이 됐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의 흥행 성적은 그에 훨씬 못 미쳤지만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한 보람은 있었다. 눈에 띄는 표지와 예쁘고 감성적인 글귀들이 입소문이 나며 판매도 제법 선방했기 때문이다. 중국 책들이 문화적 차이 때문에 국내에서 흥행이 저조한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나름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 뒤 작가님의 후속작 두 편이 한국에서 더 출간됐던 것을 보면 독자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그 두 편 중 한 편의 소설을 내가 작업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작가와 번역가, 편집자가 함께 발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출판 번역가는 일단 작품을 맡으면 그 책의 작가를 내 ‘최애 작가님’이라 생각하며 번역을 해야 한다. 남들이 뭐라 하던 번역가가 할 일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빠짐없이 충실하게 옮기는 것이다. 또한 때로는 작가가 행간에 숨겨 놓은 의도까지도 찾아내어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번역을 마치고 나면 다음은 편집자와 충분히 책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작품이 무사히 편집될 수 있도록 끝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번역이 끝났다고 번역가의 할 일이 끝난 건 아니란 이야기다. 간혹 내 번역을 편집자가 손을 대는 게 싫다고 하는 번역가도 있지만 그럴 거라면 출판 번역가를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좋은 책을 낼 수 있다면 작가와 번역가, 편집자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협력해야 한다. 3인 4각은 결국 한 몸처럼 함께 발을 맞출 때 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회사를 다니든 장사를 하든 번역을 하든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하며 각자의 역할을 잊지 않고 팀플레이를 할 때 서로에게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좋은 작가, 편집자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기에 오늘도 번역가인 나는 함께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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