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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na Aug 13. 2023

[열두 권] 외로움이란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짓으며 다리가 긴 새들이-애초에 비행이 존재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듯-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좋아하는 분께 추천을 받았습니다. 습지가 나오고 가족이 나오고 동물 이름이 나오는... 산책을 할 때 요즘 읽고 있는 책이라며 줄거리를 조금씩 이야기해 주시는데, 어느새 다음 내용이 궁금해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소개해 드릴 책은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입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살림, 2019


이 책을 한 줄로 소개하자면

고독을 노래하는 책

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고독함, 외로움이란 단어를 이보다 잘 그려낸 책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주인공의 외로움에 몰입하면서 읽어나가게 됩니다.


카야의 가슴에 검고 고운 진흙 덩어리처럼 묵직한 슬픔이 얹혔다.
해가 저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빛이 머물다 방 안에 고였다.
상상력은 깊디깊은 외로움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습지를 배경으로 어린 나이에 집에 홀로 남겨진 '카야'라는 주인공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작가는 여러 형태의 외로움을 사용합니다.


어떤 꿈들은 그냥 빛이 바래고 사라지기 마련인가 보다.
진흙을 파서 저녁거리를 장만해야 하는 아이는 상상력이 납작해져 빨리 어른이 되나 보다.
깃털 놀이 이전에 외로움은 당연히 몸에 항상 붙어 있는 팔다리 같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외로움이 카야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가슴을 짓눌렀다.
드디어 두려움이 덮쳐왔다. 바다보다 깊은 장소에서, 다시 외톨이가 될 거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두려움, 아 영원히 혼자일 거라는 두려움, 종신형 선고, 배가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기우는 와중에 카야의 목구멍에서는 듣기 싫은 헐떡임이 비어져 나왔다.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위태롭게 팔랑거렸다.
혼자서 보낸 수백만 분의 시간으로 수련한 카야는 자기가 외로움을 안다고 생각했다. 낡은 부엌 식탁을, 텅 빈 침실 안을, 끝없이 망망하게 펼쳐진 바다와 수풀을 바라보며 보낸 한평생. 새로 발견한 깃털이나 완성한 수채화의 기쁨을 함께 나눌 이 하나 없는 삶, 갈매기들에게 시를 읊어주던 나날.

주인공이 홀로 남겨져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고통들을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기 때문에 이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이야기 내용의 아름다움 보다 작가가 표현해 낸 여러 묘사의 아름다움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이 부분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해 냈지?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부분도 많아서 주인공의 외로움을 이렇게 까지 근접하게 느꼈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가을의 낙엽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한다. 시간을 타고 정처 없이 헤맨다. 잎사귀가 날아오를 단 한 번의 기회다. 낙엽은 빛을 반사하며 돌풍을 타고 소용돌이치고 미끄러지고 파닥거렸다.
습지의 부드러운 공기가 실크처럼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달빛은 뜻밖에도 소나무 숲 사이의 오솔길을 선택해 그림자를 각운처럼 흩뿌려두었다.
거친 나무뿌리 손가락이 묘석들을 찢고 뒤틀어 이름 없이 웅크린 형체들로 바꾸어놓았다. 죽음의 표식들은 모두 자연의 힘에 풍화되어 작은 혹과 덩어리로 바뀌었다. 저 멀리서 바다와 하늘이 이 엄숙한 땅과 어울리지 않게 밝은 노래를 불렀다.
아직 수줍어 겨울에 순종하는 해가 이제 고약한 바람과 못된 비가 쏟아지는 나날들 사이로 빼꼼 얼굴을 다 밀고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거짓말처럼 봄이 팔꿈치로 쑥 밀치고 들어와서는 아예 눌러앉았다.

그리고 자연물을 아름답게 묘사하면서 습지를 배경 장치로 사용한 것도 인상 깊었습니다. 낙엽의 떨어짐을 추락이 아닌 시간을 타고 미끄러짐으로 표현한다던가 어깨 위로 실크처럼 내려앉은 습지의 공기, 손가락으로 표현된 거친 나무뿌리에서 부터 팔꿈치로 쑥 밀고 들어오는 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 싶은 구절들이 많아서 표시를 여기저기 해놓으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법정의 언어는 습지의 언어처럼 시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야는 본질적으로 유사한 점을 꿰뚫어 보았다. 대장 수컷에 해당하는 재판장은 위상이 확고하므로 제 영토의 멧돼지처럼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느긋하고 두려움이 없었다. 톰 밀턴 역시 수월한 동작과 자세로 온몸에서 자신감을 풍기며 높은 위상을 뽐냈다. 강력한 수사슴의 위상을 의심할 자는 없었다. 그러나 검사는 원색의 와이드 넥타이와 어깨가 떡 벌어진 양복 정장으로 자기 입지를 본래보다 부풀리려 했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거나 언성을 높여 의견에 무게를 실었다. 법의 경위는 제일 하급의 수컷이었고 빛나는 피스톨과 쩔렁거지를 공고히 했다. '지배의 위계는 자연에서 안정을 도모하지.' 카야는 생각했다. '그런데 좀 덜 자연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봐.'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자연과 대비되는 배경적 장치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실 결국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을 가져온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게 잘 안 될 때가 더 많아. 하지만 실패한 사랑도 타인과 이어주지. 결국은 우리한테 남는 건 그것뿐이야. 타인과의 연결 말이야.
사슴이 한 마리 없어져도 무리는 아쉽지 않겠지만, 무리가 없으면 사슴은 완전할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갈망했어. 정말로 누군가 내 곁에 머물러줄 거라고, 실제로 친구와 가족을 갖게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어. 집단 어딘가에 소속될 수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도 내 곁에 머물러주지 않았어. 그쪽도 떠나버렸고, 우리 가족도 내 곁에 남지 않았지. 이제야 그런 상황에 대처하고 나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알았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이런 얘기 못 하겠어.

주인공의 깊은 외로움에서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갈망했던 건 타인과의 연결, 관계였습니다. 오랜 시간 누군과와 연결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쉽지 않았던 타인과의 연결이 그녀를 더 고독하고 외롭게 몰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외로움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한 것인지를 위 구절들을 읽다 보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카야는 혼자서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스스로를 완전하지 않다 여겼고 결국엔 자신의 처지를 극복했다기 보다는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 것 같습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다 보면, 그동안 살면서 외로움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는 깊은 고독함으로 독자를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은 '고독함'이라는 색다른 느낌을 잠깐동안 느끼게 됩니다.  그 고독함 이면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생각해보게 해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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