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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na Apr 13. 2024

[열세 권] 뜻 대로 되는 일이 없을 때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 류시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함이나 불멸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불편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내가 자각하듯이 다음의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나는 이곳에 잠시 여행 온 것이다. 나는 곧 떠날 것이다.’


 얼마 전 저녁 약속 시간에 늦었습니다.

평소쯤이면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라 넉넉히 잡고 약속을 잡았는데, 퇴근 직전 오는 업무 전화와 미묘하게 앞에서 바뀐 신호등, 찰나로 놓친 지하철 등등의 이유들로 뒤늦게 도착해 미안한 마음을 안고 약속 잡은 친구와 만났습니다. 주저리 변명을 늘어놓는 제게 오히려 상대방이 웃으며 괜찮다고, 대신 좋은 책을 하나 서점에서 발견해서 읽고 있었다고 책을 한 권 추천해 줬습니다.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는데, 지금 기다리면서 이 책을 읽으며 위안을 많이 얻었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약속에 늦은 미안함도 있고, 제목을 듣고 찾아보니 마침 전자책으로도 나와 읽길래 출근길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자기 계발서 느낌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전 문학을 다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브런치에는 마음을 위로하는 에세이를 더 많이 올린, 말과 행동이 많이 다른 제게 꽤 흥미롭게 다가오는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 책을 읽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을까요??

분명히 가볍게 읽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출근길 틈틈이 읽다 보니 한 달이나 걸렸습니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수오서재, 2023


저는 이 책을

내가 조연이라고 느낄 때 읽는 책

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조금 부끄럽게도 저는 류시화 작가를 시인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맞으시기는 한데, 제가 많이 찾아보지 않고 잘 몰랐던 탓에, 이 책의 제목을 듣고도 시집인지 되물어보았거든요.. 이 책은 시집은 아닙니다. 시집처럼 예쁜 언어가 많은 산문집입니다.


나는 나의 관념으로 그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자아를 부수기 위해 간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내 생각과 선입견을 비우고, 안으로 깊어지고 밖으로 더 넓어지기 위해.

"왜 당신이 생각한 제주도여야만 하죠?"라는 작가의 질문이 조금 냉정한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끄덕여지는 질문이었습니다. 장소뿐만 아니라,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제가 생각한 것과 달라 실망한 경험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상상과 예측이 평가의 기준이 되어 그것과 다르면 실망스럽다는 평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면 생각한 것 과 다른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그런 경험들은 기억되지 않고, 순간의 실망에 좌절했던 경험을 더 자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예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면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이 상상 밖의 인물이면 더 좋겠다. 불행과 행복의 내력이든, 상실과 성취의 경험이든 뜻밖의 이야기를 당신이 가지고 오기를 바란다. 우리는 두려움에 맞서 불가능한 사랑에 빠지고, 준비하지 않았던 일을 경험하기 위해 이 행성을 여행 중이니까. 가슴에 믿음을 품고 별에 닿기 위해.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경험보다 실망을 더 크게 생각해 왔던 제게 작가는 한번 더 말해줍니다. 우리는 여행 중인 거라고. 우리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이 이상한 건 아니라고.

삶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그게 바로 인생이 주는 선물이라고 말해주는 부분을 보며 이 책을 계속 읽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 준 사람을 몇 번이나 만났는가에 따라 방향이 정해진다. 마음을 닫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안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관계에서 찾아진다.
삶을 꽃피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스로 꽃을 피우는 일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삶이 꽃이 피어나도록 돕는 일이다. 당신도 나도 누군가를 꽃 피어나게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삶을 경험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하고,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라는 말이.. 공감은 많이 되지만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조금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타인과의 관계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가는 것도 사실 그만큼 삶을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음을 의미하는 거겠죠?


함께 여행하는 짧은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툼과 무의미한 논쟁으로 허비하는가? 너무나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단점을 들추고, 잘못을 비난하며, 불쾌감 속에 시간을 흘려보내는가?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부분이 많은데, 아마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분이 이런 부분들로 위로를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위로를 받았거든요.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들이 여행의 짧은 순간들이 모인 거라고 생각하면 지나온 나쁜 경험들도, 조금 너그러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함이나 불멸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불편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내가 자각하듯이 다음의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나는 이곳에 잠시 여행 온 것이다. 나는 곧 떠날 것이다.’


해 버린 일에 대한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지만,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생의 저녁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은 하지 않은 일이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뒤로 미룬 일, 주위의 만류와 일반화의 논리 때문에 포기한 일,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을 감춘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흥미진진하고 의미로 채워진 영화 같은 삶을 유예시키고 관객석에서만 살아간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삶인데도.

예전에는 '후회'에 많은 무게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 안 해보면 후회할까 봐 무조건 이것저것 해보려고 시도하고, 그랬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타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후회할까 봐 하는 일이 너무 힘들고 지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랬더니 삶이 편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조로워지기 시작하더군요. 한 주, 한 달 그리고 몇 달이 지나도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이 지속되고, 그 안에서 예측 가능한 내일이 보이고, 예측은 벗어나지 않고.. 그러던 와중에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삶은 내 것이기 때문에 관객석에서만 앉아있지 않고,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삶에서 새롭고 흥미진진하게 나아가 본다는 게 공감이 많이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브런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가장 후회되는 글은 생각만 하고 쓰지 않은 글이다.
우리가 생각에 붙들려 있을 때 삶은 흘러간다. 삶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삶을 놓친다.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말이죠.


글을 쓸 때 벽에 부딪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뛰어난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 쓰지 못한다고 절망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포기한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으면 한 번씩 글을 쓰게끔 꼬드기는(?) 알림이 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림을 외면하는 이유는 글을 쓰는 게 여전히 컴플렉스여서. 저에겐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쓸수록 글을 쓰는 실력이 늘어난다는 것도 알기는 하지만, 잘 안 됐었는데.. 오늘 문득, 어차피 오늘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용기를 가진다고 해도, 삶은 흘러가니까. 어차피 오늘은 지나갈 거니까 일단 써보려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작품 세계와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떨림이 서툰 언어 속에 녹아들어 있는 글은 독자의 혼을 건드린다. 아직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젊은 시인이 보낸 ‘흙이 숨겨 놓은 봄을 발견할 때까지 눈을 감고 오직 밑바닥에 닿아야 한다’라는 시구는 어딘지 뭉클하다. 어쩌면 우리가 작가에게 기대하고 감동하는 것은 삶과 세계에 대한 능숙한 해석이 아니라 그 불확실한 계절에 가닿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우리는 시도하고, 시도하다가 생을 마치는 운명이다. 그것이 시든, 음악이든, 그 무엇이든 그대가 ‘이룬 것’을 들고 내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툴고 거칠더라도 혼을 담아 ‘시도한 것’을 들고 오면 더 좋겠다. 그러면 나도 이 삶에서 시도한 것들을 보여 줄 것이다. 겨울 속에서 봄을 시도하고, 불완전한 환경에서 완전한 사랑을 시도하고, 굴레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깨달음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많이 다른 존재가 아니다.

저는 작가님의 글을 빌려 글을 쓰는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이런 예쁜 이야기가 있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봄의 주머니에서 꺼낸 이름들로 꽃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같은 종족의 사람이라도 저마다 이름이 있듯이, 같은 부족의 제비꽃일지라도 얼굴과 표정이 제각기 다르기에 그저 제비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상처도 마찬가지다. 상처마다 그 상처의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그저 상처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상처는 영혼의 일이므로 각각의 상처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어야 한다. 그것이 그 상처에 대한 존중이다.
‘모두가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의 암시는 조언이 아니라 무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는 화살을 다섯 개나 등에 꽂고도 성공해서 잘 살고 있다고 예를 든다. 위로도 아니고 격려도 아니며, 호러일 뿐이다. 그때 관계는 멀어진다. 영혼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저 역시 제 상처를 가장 크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인데, 어느 날 아침 위 구절들을 읽고 나서 며칠 전 어떤 일이 있어 힘들었다고 말한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그 마음을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걸 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어 출근하자마자 친구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꽃이 피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 꽃이 자라는 환경을 바꿔야 한다. 누구나 삶에서 고립을 경험하고, 그때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나름의 몸짓을 한다.
인간은 날개가 없는 대신 웃는다. 웃음은 가슴의 날갯짓이다. 웃음과 울음은 같은 지점에 있고, 희망과 절망도 강은 곳에서 태어난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심장이 침묵하지 않게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한번씩 예쁜 말들이 보여 많이 메모하고 공유하고.. 책을 읽으면서 행복했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평생 애피타이저만 먹으면서 “내가 상상한 음식이 아니야.” 하고 불평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아직 앞에 나타나지도 않은 메인 요리를 평가하며 좌절과 실망 속에 너무 일찍 포기하는지도. 그래서 자신이 삶에게 기대하는 것뿐 아니라 삶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까지 부정하면서 희망과 화해하기를 거부하는지. 자신을 위해 신이 준비한 멋진 메인 요리가 있는데 불하고.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메모를 가장 많이 한 책이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는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수도 있는 말이라서 어쩌면 너무 뻔한 말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앞에 앞으로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걸 부정하고 화해하기를 거부하는 게 올바른 시각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주연이자 작가인데 때로는 주연임을 잊어버린다는 것, 그리고 그것 조차도 흥미로운 요소라고 작가는 말해줍니다. 그리고 리허설은 없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상영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는 잠깐 여행처럼 제작되고 있을 것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알아갔습니다. 이 책을 읽는데 한 달이나 걸린 이유는 저의 출근길이 이 책 덕분에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산문집 형태이기 때문에 여러 이야기를 이 책 안에서 경험해 볼 수 있었고, 그러면서 전날 과는 다른 그날의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뜻 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느껴지시거나, 내일이 기대되지 않으신다면,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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