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재희 May 14. 2020

어느덧 마흔 줄, 80년생 99학번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80년대생 찬가

넷플릭스에서 뭘 볼지 빙빙 돌려가며 고민하다가 결정 장애인 내 모습에 짜증이 날 무렵,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정착했다. 이 드라마는 1980년생 의대 동기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 편만 봐도 ‘응답하라'시리즈가 바로 떠오를 정도로 느낌이 비슷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응답하라' 제작진이 만든 드라마였다. 다만 과거 회상 및 추억 되새김질이 주된 내용이었던 응답하라 시리즈에 비해, 이 드라마는 약간의 과거 회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재 자신들의 이야기가 주라는 점이 달랐다.


1980년생이면 99학번이다. 몇 년 전부터 건축학 개론, 그리고 몇 차례의 응답하라 시리즈 등 80년대 말에서 90년대 말 학번들이 다양하게 지난시절을 추억하는 작품들이 나왔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주인공들을 아예 1980년생, 서울대 의대 동기라고 명확히 못 박은 것을 보면 1980년생 작가 또는 누군가가 꼭 집어서 자기 동기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동갑내기 또는 같은 학번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한국 특유의 환경에서, 비슷한 세대의 이야기 말고 꼭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들의 동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세대이기에 줄곧 공감하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드라마의 다섯 친구들은 자신들의 직장인 대형 종합병원에서 중견 의사들이다. 자기 분야에서 이미 알아주는 실력을 가진 전문의이자 후배 의사들을 이끌면서 가르침을 주고, ‘교수님' 소리를 듣는 위치에 있다 (이런 장면에서 나는 여전히 흠칫 놀라곤 한다. 내 주변 동기나 후배들도 이미 교수 타이틀을 단 친구들이 꽤 있지만, 여전히 내 주변 세대가 과장님도, 팀장님도 아닌 ‘교수님’ 소리를 듣는 나이라는 사실이 쉽게 적응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위 꼰대 짓을 하는 병원 윗분들에게는 적당히 듣기 좋게 반항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왜 결혼을 안 하는지,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부모로부터 끊임없이 잔소리를 듣기도 하는 등 아직은 젊은 티를 내기도 한다. 그중 누군가는 이혼, 싱글대디, 부모와 본인의 건강 악화 등 제법 무거운 인생 문제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성숙한 나이이기도 하면서, 또 누군가는 아직도 풋풋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젊기도 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자신의 나이를 인정함과 동시에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외모 관리도 잘해서 아직은 젊은 세대로 봐줄 수 있는 느낌이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이들이 배우/연예인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하는 짓을 보면 아직 젊은이 티를 벗지 못한, 또는 벗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읽힌다. 40줄에 접어든 바쁜 의사들이지만 여전히 정기적으로 모여서 밴드 연습을 하고, 떡볶이 분식을 자주 사 먹고, 말싸움을 하면서 투닥거린다던지, 이제 와서 친구의 여동생에게 고백하는 등의 오글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이런 모습은 내 주변 세대가 스무 살 일 때 40대 어른들에게 보이던 모습은 분명 아니다. 내가 대학 신입생일 당시에는 학번 차이가 10개 이상 나는, 즉 30대 초반의 선배만 봐도 상종하기 힘들 정도로 나와는 다른 어른의 느낌이었다. 당시에 40대는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아마 젊은 티는 정말 하나도 나지 않는, 완연한 기성세대 아저씨/아줌마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80년생들이 어느덧 40줄에 접어든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가 20대일 때 40대에게 갖고 있던 그런 완연한 어른의 이미지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 이 세대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성향,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을까. 


80년생들과 그즈음의 세대는 90년대라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기, 그래서 대중가요나 트렌디 드라마, 카페와 클럽 등 대중문화가 꽃피던 시기에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좀 더 놀 줄 알고 철이 늦게 들었다. 또는 철이 완전히 들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어두웠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이전 세대들은 철이 빨리 들었고 ‘우리’가 아닌 ‘나'를 위해 노는 것에 대해 가치를 비교적 덜 부여한 반면 80년생 주변세대는 그전 세대들에 비해 좀 더 내가 하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가 크고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된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시기가 90년대라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90년대는 한국경제가 선진국을 목표로 고속성장을 이어가던 시기인데,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라가 이렇게 고속성장을 하는 것의 의미는 크다. 미래는 현재보다 좋을 것이며, 열심히 노력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는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최근의 젊은이들이 저성장, 양극화 시대를 살아내며 좀 더 좌절감을 느끼고, 미래를 보며 사는 것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며 ‘소확행'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80년생 즈음 세대는 꽤나 야망도 있고, ‘출세’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 이들이 많다 (여담이지만 최근의 중국 젊은 세대들에게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성장기에 비슷한 환경, 즉 선진국을 바라보며 고속성장 중인 국가라는 환경에 놓였던 영향이 클 것이다).


이들은 이전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경쟁적인 입시제도를 겪었어야 했는데, 선배들과는 달리 대학 진학 이후에도 여전히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97년 말에 터진 IMF 사태 이후 흉흉해진 캠퍼스 분위기에서 이전 선배들 세대처럼 캠퍼스의 낭만 (또는 그 이전 세대의, 캠퍼스에서의 투쟁) 같은 건 없었고 열심히 학점관리와 스펙관리, 자격증 준비를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실력과 스펙이 좋아졌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학교생활이나 기업문화가 지금보다 더 경직적이고 위계질서를 강요하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한 조직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윗분 눈치 안 보고 내 목소리를 내거나 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세대와는 달리 적당히 윗분 눈치를 보기도 하고, 좋지 않은 기업문화는 싫지만 싫은 티 안 내면서 그럭저럭 따라가는 편이다. 그래서 야근에도 익숙하며 열심히 일한다.


이들은 어린 시절에는 88 올림픽, 대학생 시절에는 2002 월드컵을 경험하며 애국심이 고양되는, 소위 국뽕이 차오르는 경험도 했지만, 성장기 대부분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꽃핀 시대에서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과거 경제성장기 군사정권 시절을 단절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그 시절을 추억하는 세대를 후진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한국, 자랑스러운 한국인 같은 콘텐츠를 좋아하고 그에 대한 욕구가 있으면서도, 일부 변함없는 한국의 후진적인 모습에 자조하기도 하고, 서구 선진국과 항상 비교하며 부족한 모습들에 주목하기도 한다.  


종합해 보면 80년대생과 그 주변 세대는 놀기도 좋아하면서, 동시에 능력도 있고, 출세 욕망도 있으면서 격무와 불합리한 조직문화를 버텨낼 심리적 맷집도 있고, 그러면서도 좀 더 나은 방식과 제도를 바라는 세대이다. 한 마디로 어디 가서 일 잘한다는 말 듣기에 딱 좋은 세대이다. 80년대생 전후세대가 ‘일 잘하고 똑똑한 세대’가 된 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아온 결과이겠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전 세대에게 빚진 것도 없지 않다. 경제발전과 자식 교육에 올인한 부모세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선배 세대가 이루어낸 민주주의 사회를 누리며 좀 더 공부와 놀이, 그리고 자기 발전에 시간을 투자하며 빚어진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드라마로 다시 돌아와서, 어느덧 중견 의사가 된 80년생 5인방 주인공들은 개성과 성격은 다르지만 모두 능력 있고 일 잘하며 책임감 있는 멋진 캐릭터들로 나온다. 극 중에서 이들의 선배 의사들은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뒤에서는 폭언을 일삼는다던가, 실력보다 이미지에만 신경 쓴다던가, 시대에 안 맞는 꼰대질을 하는 등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과 대비된다. 동시에 이들 5인방은 후배들에게는 능력 있는 멘토이자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능력있고 멋진 이들이 앞으로 더욱 성장하여 병원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오르면 이 병원은 지금보다 좀 더 좋은 병원이 될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을 준다. 


현실 세계에서의 80년생들도 어느덧 사회적 전성기라 할 수 있는 40대 초반에 접어들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젊은이 취급을 받던 이들이지만 이제 앞으로 10년, 20년간은 사회 곳곳에서 일을 주도하며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가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훌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 잘하고 놀기도 잘하며 항상 치열하게 살아온 이 세대, 이전 세대들보다 뭐든 더 잘해서 지금보다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 80년생 파이팅.

매거진의 이전글 대치동 아파트와 미국, 유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