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까지 교회를 다녔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바로 '원죄'라는 개념이었다. 성경에서는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나름 큰 해악을 저지르지 않고 스스로 착하게 산다고 자부했던지라 내가 어떤 죄를 지었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교회를 가지 않게 된 지금, 오히려 그 원죄를 더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이제 사람인 것 자체로 죄가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내가 산다는 것 자체에 명암이 있고 누군가에게 해악이라는 걸 알겠다. 알게 되어 시원하기보다 좀, 고통스럽다. 기도를 통해 회개가 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 회개는 평생 책임을 지는 일 같았다.
재작년이었을까? 장애인권에 대해서 더 알아야겠다는 책임감으로 '책방 들락날락'의 장애학 입문 책모임을 신청했다. '장애학의 이해'라는 두꺼운 주황색 책을 열심히 읽(으려 애쓰)다가 참석했다. 평소에 장애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언어로 정리되는 기분은 아주 시원했다. 하지만 그 책은 '정체성 정치' 부분부터 배경지식이 부족한 나와 만나 애매함을 남겼다. 책모임 중에 나는 장애학에 대한 책을 읽은 것이 처음이라 "잘 몰라서 어렵다"는 말을 했다.
귀가 후 후 책모임 단체 카톡방에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잘 모른다’는 말에 대한 글이었다. 내가 한 말이었다. 온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몰라서 모른다고 했는데 이것 가지고 이런다고?'
반감이 먼저 들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뭔가가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고개를 들었던 반감은 점점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몰라도 되는 특권.'
내가 지금까지 장애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것은, 몰라도 괜찮았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의 '권력'이었다. 비장애의 몸을 기준으로 설계되고 돌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비장애인'이라고 분류되는 나는 장애로 인한 폭력이나 차별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장애에 대해 딱히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갖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장애인 당사자였던 그분은 모른다는 말이 상처가 되었다고 했다. 카톡방의 책 모임 동료이자 큰 앎을 준 그분께 사과했다. 그리고 더 알아가겠다고 했다.
"전 몰라요."
“나는 잘 몰라서…”
“딱히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른다는 건 지금까지 무관심해도 되는 안전한 삶을 살아왔다는 말. 누군가는 그게 삶이어서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돌릴 수 없다. 이미 그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권을 몰라도 되는 건 비장애인의 권력이다. 페미니즘을 몰라도 되는 건 남성의 권력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라도 되는 건 전쟁으로 일상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의 권력이다. 기후위기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건 돔 속 사람들의 권력이다. 동물권을 몰라도 되는 건 인간의 권력이다.
권력에는 책임이 있다. 알아가는 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함께 진창에 빠지는 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동물권 활동을 하다 보면, 정말 자주 듣는 말이 '잘 모른다'이다. 인간의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인간동물이 어떤 일을 당하던 관심을 갖지 않아도 지장이 없다. 비인간동물을 귀여움과 예쁨으로 소비하려고만 하지, 그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까지 굳이 알지 않겠다는 -몰라도 되니까- '선 긋기'의 말이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 동물들은 자신들에게 왜 이런 폭력이 가해지는지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잘 모른다'는 말을 했을 때 그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말 자체보다 그 이후에 어떻게 책임을 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모른다고 한 후에 알아가기 위한 노력들을 하는가? 아니면 모르는 채로 권력에 대한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며 똑같이 사는가? 나에게도 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권력이 덕지덕지 붙어있음이 확실하지만, 가능한 한 전자로 권력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다. 가능한 한 알아가는 것을 선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