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어느 날 여행지에서 가장 먼저 쓴 글
'줏대를 찾아서'
라는 거창한 부제를 붙이고 6월을 시작했는데 벌써 6월이 끝나 간다. 뭐 했다고 벌써 한 해의 반이나 지났나. 사실 이건 뭐 '안' 했을 때 하는 말이니 정정 하도록 한다. 아무것도 안 해서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났다. 아 그리고 나는 지금 퇴사 후 여행 중이다.
여러 가지 핑계로 여행길에 올랐다. 내 인생에 언제 또 이렇게 긴 텀으로 쉴 수 있을까. 20대 때 부모님 돈 받아서 해외여행 가는 애들 손가락 빨면서 지켜보던 한을 이렇게라도 풀어야 하지 않나. 뭣보다 7월의 한국은 너무 덥고 습하니까. 여행지 후보가 꽤 많았는데 결과적으론 한국인의 대표 관광코스인 런던 앤나 파리 조합. 장마와 더위를 피하기엔 북서부 만한 데가 없지 싶었다. 이걸 쓰는 지금, 나는 런던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해안가 도시 브라이튼. 이곳은 예상만큼 건조하고 또 예상외로 춥다. 그리고 물가가 정말 개미쳤다. 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요동치는 세계 경제 상황, 이런 거 제대로 모르고 시작한 거였으니 꼴좋다. 주변에다 '나 퇴사하고 여행 간다!'라고 저질러 놓은 말이 많아서 안 갈 수도 없었다. 비행기와 숙소 값만으로 몇 백을 공중분해시키고 온 여행은, 좋다. 오니까 좋긴 한데 통장잔고랑 카드값은 되도록이면 안 보려고 하는 중이다.
백수. 진짜 이런 식으로 백수가 되다니. 백수만으로는 성에 안 차서 여기에 사리로 '불효녀'를 추가했다. 무슨 말이냐면, 큰 딸의 퇴사 사태를 아빠는 아예 모르고 있다. 지금 내가 서울시 어느 구 어느 동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고 있을 울 아빠. 딸내미 먹고사는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아빠를 걱정시키기 싫었다. 는 핑계고 잔소리 듣기 싫어서가 정답이다. 자식새끼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야 너 대책 없이 어떡하려고 그래! 나중에 아빠가 알게 되면 첫 대사는 아마도 이럴 거다. 그러게. 대책이 하나도 없는데 이제 어쩌지. 그렇다고 뭐 언제는 내 삶에 그렇게 대책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다. 세운답시고 세운 대책은 대부분 쓸모가 없었다. 플랜비 플랜씨 짜봤자다. 인생엔 변수가 놓인 구석이 생각보다 많고 갈래길과 사잇길은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선택을 종용한다. 그런 것들을 하나씩 응대하다 보면 계획대로 되는 인생이란 건 시나리오 작가의 손가락 아래에서 타이핑된 캐릭터들의 16부작 서사 말고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저마다 다른 형태의 생각과 취향으로 각기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건 다 이런 이유에서다.
이 여행의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생각과 취향을 잘 모르겠어서, 였다. 언제부턴가 눈앞에 가는 실안개가 껴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한 발 한 발 뻗기는 하는데 도통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는 기분. 그게 걷히려면 바람이 불고 해가 떠야 할 것 같아서, 무작정 길을 걷지 않고 잠시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어느 길을 가든 상관은 없다. 다만 길인 걸 알고 걷고 싶었다. 이 선택이야말로 내 인생의 대책인 셈이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어떤 걸 할 때 기쁜지, 어떤 상황에서 재밌는지. 그런 걸 잔뜩 고민하고 적어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앉은 자리에서 토독토독 그런 걸 적다 보면 안개가 걷히지 않을까. 실은 이마저도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믿어보기로 했다. 이 애씀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줏대를 찾아서'
여전히 이 부제는 유효하다. 아직 삶은 계속되고 있고 나는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계속 애쓰고 있으니. 숙소 창가 너머 브라이튼 바다를 바라보며 언젠가 바다 근처에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뚜렷해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