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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글방 Sep 18. 2023

그래서 나는 작업실로 도망쳤다

육아스트레스 99퍼센트의 위로

양육태도검사에서 육아 스트레스 99퍼센트가 나왔다. 2021년 봄의 일이었다.     


진단 결과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 상태가 어떤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건, 전문가의 조언이나 검사가 아니어도 느끼고 있었다. 아, 내 속에서 99도의 뜨거운 물이 들끓고 있었구나. 그래서 고작 1도씨가 높아져도 쉽게 폭발해 버렸구나.


위험해진 나에게서 아이를 지켜야 했다. 그 무렵의 나는 때때로 아이의 가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과는 별거 아닌 일로 자주 다퉜다. 내가 견딜 수 없어하는 부분이 남편에게 있었고, 남편을 견딜 수 없게 하는 부분이 내게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내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던 안 좋은 것들도 나를 한계로 몰아넣었다. 연이어 친정 식구들이 많이 아팠고 코로나와 함께 유례없는 전염병의 시대가 시작됐으며 아이의  초등학교 문제로 몇 번의 이사를 했다.


분양권을 사려다가 계약금을 날렸으며 남편은 보이스피싱을 당했고, 코로나 기간에 재택이 가능한 프로그램밖에 할 수 없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동안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남편의 휴직과 나의 방송 수입이 줄며 가정경제는 마이너스를 찍었고, 코로나로 오랜 기간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를 돌보며 하루하루 버텨내듯 방송 글과 장르소설을 쓰는 사이 지쳐갔다.      


집에서 일을 하는 동안 학교에 가지 않는 여덟 살 아이는 계속 엄마를 찾았다. 발도르프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학교 방침상 TV나 스마트폰 같은 미디어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원래도 TV를 보여주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급한 원고를 써야 할 때면 한 시간이라도 TV를 보여주고 싶다는 유혹이 찾아왔다. 학원 역시 4학년이 될 때까지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코로나로 학교에 가지 못한 그 시간 동안 아이 돌봄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방송 수익이 줄며 남편은 더욱 바빠졌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나는 항상 피곤했고, 몸살을 달고 살았으며 몸 곳곳의 조직을 떼어내 검사하는 일이 잦았다. 악성이 아니라는 결과를 들을 때마다 안도하면서도 의아함이 생겼다. 큰 병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아픈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다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2022년 초여름, 나를 사로잡은 감정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가. 남편은 바쁘고 아이는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돼 학교에 가기 시작했지만 등하교 픽업부터 잠들 때까지의 돌봄은 여전했는데.


하나하나 상황을 따지고 보면 나는 떠날 수도 없고, 떠나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의 나는 어디든 떠나야만 살 것 같았고, 육아 10년 차의 나에게 그 정도는 해줘도 될 것 같았다. 육아로부터, 집안일로부터,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작업실로 도망쳤다.       

    

내가 찍은 사진에 언니의 캘리그라피로 올 초에 만든 표지


수정만 하다 출간을 못할 거 같아 고성에 다녀와 써놓은 글을 조금씩 꺼내놓으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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