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H Oct 10. 2021

온(溫), 게국지

비 내리고 바람 흩날리는 태안에서의 따뜻한 게탕 한 그릇

춥디 추운 회사다.

모든 일이 다 내일까지다. 

한꺼번에 할 순 없기에 우선순위를 세워놓으면, 그 경쟁에서 도태된 일들이 아우성을 친다. 

그 소리 없는 아우성들이 듣기 싫어 야근을 자청하자니 몸이 금세 지쳐버린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며칠 연속 출근하자니, 결국 마음이 무너져버리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도 모든 일은 내일까지일 텐데 위기다.


차디참을 피해 잠시 남쪽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이렇게 무심코 일요일 아침 태안으로, 모처럼 계획하지 않은 길을 떠났다.

질병 하나에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뒤로 모든 것은 계획의 연속이었다.

갑작스럽게 한다는 것은 곧 계획 없이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동경보다는 따가운 시선을 더 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책임져야 할 이, 함께하는 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계획을 하고, 급작스러운 행동을 자제하면서 살았다. 


그렇게 2년간 모든 것에 계획이 서 있던 사람이 무심코 여행을 떠나려니, 파격에는 역시 대가가 따른다.

충청도에 들어설 무렵부터 빗방울이 슬슬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태안읍에 들어설 무렵부터는 세찬 빗줄기로 바뀌었다. 노을길, 자연휴양림, 꽃지 해변 그리고 할미할배바위까지. 차 타고 내려가는 내내 꿈꿨던 눈을 통한 위로와 따뜻함의 향연은 안녕. 

평범한 범인의 마음에는 관심조차 없는지,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지기만 했다. 좋은 풍경을 보고 먹는 밥은 훌륭한 전채와도 같아서 조금 더 기다려보았지만 이제는 글렀다. 몸에서 느끼는 따사로움조차 없으면 이 갑작스러운 여행은 소득조차 없이 허무하게 끝날터, 들르기로 했던 가게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게국지다. 

과거의 먹고 남은 게장 간장으로 담가먹었던 절임배추 반찬이 아닌, 화려한 꽃게탕의 변형으로 재탄생한 게국지. 

방송의 여파로 잘못 유래가 알려졌지만, 결국은 더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재탄생한 게국지.

게다리가 한두 개 들어갈까 말까 하던 과거의 비린 게국지가 더 이상 아니었다. 

충청도 해안가 지역에서 1년 내내 담가먹던 게장의 남은 유산이자 생존 음식은 이제 추억의 일부분으로만 남게 되었다.


요즘의 게국지는 진화의 상징이다.

살이 가득한 꽃게 몇 마리에 배추와 새우, 미더덕이나 굴 등을 넣고 푹 끓여 진하게 우려낸 해신탕에 가까운 음식이다. 

유래가 좀 바뀌었으면 어떠한가. 오래 전의 비리고 아릿한 기억은 찾기 어려워졌어도, 게살의 바다향을 듬뿍 담은 따뜻한 게국지탕은 속을 덥히기에 충분하니 몸이 노곤해지고 근육들의 긴장이 풀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게다리 하나를 집어보았다. 

미처 덜 잘린 몸통까지 함께 나온다. 다 자르지 못한 게에서 풍성함이 느껴지고, 풍성함은 따뜻한 엔돌핀을 돌게 해준다. 끼고 있던 비닐장갑을 바로 벚어젖혔다. 팔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가위를 든다. 이런 음식은 먹을 때도 풍성하게 전투적으로 먹어주는 것이 예의일 테니까. 


그 뒤부터는 오로지 즐기는 이의 선택이다. 

쫄깃한 게살을 먼저 먹고, 한번 더 끓여 조금이나마 더 바다의 향이 밴 국물을 먹을 것을 수도 있다. 

게살과 함께 통으로 더 끓여, 살의 향이 녹아든 온전한 인내의 선물을 느낄 수도 있다.

뭐든지 어떻게 먹어도 결국 속이 편안하고 따뜻하다. 

수제비나 칼국수가 있다면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넣게 된다. 쫀득한 밀반죽에서 나오는 전분이 걸쭉한 국물을 만들어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밖은 차디치자만 몸과 마음이 따뜻해졌으니, 두 시간의 거리가 아깝지 않다.

차가운 세상에 덴 일주일을 뒤로하고, 다시 모든 것들을 대면할 용기가 생겼다.

다음 주에 다시 쳇바퀴를 돌다 보면 생각날 테니, 올라가기 전에 한 그릇 더 먹고 가야겠다.

너무 자주는 말고 가끔씩만 보기를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