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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Sep 26. 2023

축생도를 가로지르는 예수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 <당나귀EO>(2023)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대를 받아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

붉은 조명 속에서 카산드라(산드라 지말스카)는 쓰러진 이오를 부둥켜안고 소리친다. 이윽고 시간이 빠르게 역재생되며 이오를 일으켜 세운다. 붉은 조명 대신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공연 무대 위에 꼿꼿하게 서 있는 카산드라와 이오를 비춘다. <당나귀 EO>는 ‘이오’(당나귀의 울음소리에서 빗댄 이름)의 부활로 시작하는 영화다. 부활은 이 당나귀의 구도자적 여정을 암시한다. 이미 한번 죽음을 맞이했던 당나귀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보다 더 낮은 자리로 향한다. 공연장 바깥에서는 ’동물 서커스 중단‘을 외치는 동물권 단체의 시위가 한창이다. 법에 따라 이오는 서커스단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인도된다.  


서커스 무대에서 카산드라와 이오는 함께 연기했지만 공연의 주인은 엄연히 카산드라다. 이오는 서커스 공연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카산드라와 이오는 공연자와 도구를 넘어선 정서적 교감을 이루었다. 카산드라의 곁을 떠나 마주하게 된 다양한 축생도의 삶 속에서 카산드라와 같은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주마 목장에서 짐을 옮기고, 아이들을 위한 체험용 당나귀가 되고, 야생의 숲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여우 모피 공장과 살라미용 말고기 트럭을 거쳐 황량한 외진 저택에 이르기까지 장소에 따라 이오는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 어디에서도 소통과 교감을 기대할 수 없다. 이오는 계속해서 카산드라의 손길과 눈길을 그리워한다.


극 중 이오의 역할을 맡은 당나귀는 모두 여섯 마리다. 이오는 다양한 장소로 이동하는데 공간의 이동은 의도적으로 분절된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역할과 기능으로 쓰이는 이오는 모두 다른 당나귀이자 하나의 당나귀다. 각기 다른 여섯 당나귀가 하나의 메시지를 연기하는 같은 당나귀인 것이다. 동물 배우를 배려하기 위한 이 선택은 모든 동물이 ‘너’이자 ‘나’인 영화의 메시지와도 일치한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붉은빛의 시퀀스는 각기 다른 동물의 시점을 보여준다. 숲 위를 활강하는 듯한 버드아이뷰의 시퀀스는 웅덩이에 처박히는 새의 시체로 끝난다. 목장의 백마는 좁은 운동장을 기계에 매달려 둥글게 맴돈다. 네발 로봇은 쓰러지고 달리다 반사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한다. 이처럼 동물 혹은 동물 아닌 존재들은 폐쇄된 공간에 갇혀 존재적 고립을 겪으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붉은빛의 시퀀스는 곧 축생도의 다양한 죽음의 모습이다. 감독은 이 축생도에 인간을 포함한다. 살라미용 말고기를 운반하는 트럭 운전사는 먹을 것을 구하는 흑인 여성에게 먹을거리를 주고 성관계를 제안한다. 여성은 도망가고 운전사는 괴한에 의해 죽는다. 트럭 내부의 붉은 조명이 그를 붉게 비춘다.


이오는 의문의 남자를 따라 외진 곳에 있는 황량한 저택에 도착한다. 시공간이 분리된 듯한 저택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 역시 모호하다. 엄마와 의붓아들로 보이는 이들은 종교적 예식을 치른 뒤 부정한 관계의 뉘앙스를 풍긴다. 이곳에서 이오는 아무 쓸모가 없는 외부의 존재다. 이때 이오를 향해 대문이 열리며 파란 화살표가 보인다. 저택을 나선 이오는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댐 앞의 다리 위 정점에 멈춰 선다. 마치 ‘어디로 갈 것인가’ 고뇌하는 것처럼. 이오는 물줄기가 그러하듯 더 낮은 곳으로 향한다. 이때 물줄기는 시간을 거슬러 다시 한번 역재생된다.


이오를 부활케 했던 역재생이 다시 반복되며 죽음으로 향한다. 마침내 이오는 소 도살장의 한편에 서게 된다. 이곳에서 이오는 자신의 방향을 선택하지 못한다. 귀에 번호표를 단 소들 사이에서 이오는 겁에 질린 채 도축의 행렬에 내몰린다. 이오는 축생도에서 가장 흔하고 초라한 방식으로 죽음 앞에 선다. 그러나 이오는 몸소 그곳에 존재한다. 계속해서 더 낮은 곳으로 향했던 이오의 여정은 그렇게 끝난다. 축생도를 가로지르는 당나귀의 수난사는 인간 사회를 비판적으로 가시화하는 한편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당나귀의 생생한 실존을 가시화한다. 대사가 없는 주인공이 존재적으로 내뿜는 함의는 이러하다. ‘내가 여기 있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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