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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Jul 02. 2023

빈곤한 자아의 초상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큐어>(1997)


타인은 지옥이라는 착각과 내가 신이라는 착각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큐어>는 살인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범죄 스릴러의 흐름을 따라가지만 타카베(야쿠쇼 코지) 형사가 싸우는 대상은 자신의 심연이다. 무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심연은 일상을 잠식한 불안과 억압된 감정들로 위태롭다. 그리고 이는 비단 타카베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탁물을 찾으러 세탁소에 온 타카베 옆의 손님은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불평과 욕설을 중얼거린다. 이내 주인이 돌아와 옷을 건네주자 평범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난다. 내면에 도사린 스트레스와 불안을 끌어안고 참는 많은 현대인의 모습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이며 무의식 속에서는 살인조차 불사할 충동을 느낀다는 것이 <큐어>의 도쿄에 가득 찬 불쾌함의 공기다.


잇달아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피해자의 시신 목과 가슴에 십자 표시가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정신과 의사 사쿠마(우지키 츠요시)는 범죄 행위가 우연이며 무의미하다고 일축한다.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 형사 타카베는 이 사건에 집착하게 된다. 타카베는 외부 자극에 민감하고 뛰어난 직관과 관찰력을 가진 형사다. 달리 말하면 예민한 성정이다. 예민함은 형사로서 좋은 자질이지만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아내 후미에가 텅 빈 세탁기를 돌리는 소리는 타카베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살인 사건의 배후 용의자인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는 타카베의 자질을 알아본다. 마미야의 집을 방문한 후 타카베는 후미에가 자살하는 환영을 본다. 아내를 견디기 힘들었던 타카베에게 후미에의 죽음은 두려움과 동시에 해방이었다.


<큐어>의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두려움에 지고 자신 혹은 타인을 살해하는 사람 그리고 타인을 조종하려는 오만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 조종하는 이 외에는 조종당하는 사람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마미야는 최면을 이용해 손쉽게 누구든 조종할 수 있다. 마미야가 최면을 걸 때 건드리는 두려움은 얕고 피상적이다. 그러나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타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 타카베는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인물이다. 가해자가 불빛에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부정적 반응에도 이를 개의치 않고 불빛을 비추며 신문한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마음에 상처”주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타카베의 예민함과 오만을 특별하다고 말해주는 마미야에게 그는 이미 심적적으로 동했을지 모른다. <큐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착각과 자신이 신이라는 오만이 만나 살육이 해방이 되어버린 핏빛 도시를 그린다.


인간의 정체성은 분노인가


‘그냥‘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많다. 인간이 그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냥’이라는 말속에 숨은 무의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마미야는 피상적인 상황과 감정을 연결하고 건드리는 것만으로 윤리관을 손쉽게 뒤집어 살인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만든다. 자신의 분노와 불안을 적절히 억압하고 관리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살인을 한다. 마미야는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혐오감을 부추긴다. 누구를 왜 죽이는지, 그 혐오와 불만의 크기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큐어>는 그저 윤리관의 연약함을 강조하며 범죄자와 평범한 시민의 경계를 흐린다.


마미야가 최면을 거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끝없는 질문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상대의 말을 단서로 누구나 무의식 속에 한 두 가지 가지고 있는 분노를 일깨운다. 그러나 인간의 분노는 발산한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치유되지 않았고 모든 가해자들은 고통스러워했다. 사쿠마의 시점을 통해 보여준 내적 과정은 최면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단순히 분노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두려움에 가깝다. 최면에 걸린 사람은 무의식 속 두려움을 마주한다. 최면 속에서 사람들은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살아남기 위해 칼을 들뿐이다. 두려운 존재에게 십자가를 그으며 자신이 치유되기를 바란다.


<큐어>는 두려움으로 인해 살인도 불사하게 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내면의 두려움을 외부에 투사했을 때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마미야 자신이 ”텅 비어버“렸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외부로 투사했기 때문이다. 마미야의 내면에 가득했던 불안과 두려움이 그의 정체성이다.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단순한 제거를 통해 치유와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마미야의 최면이 통하지 않았던 타카베는 어쩌면 마미야보다 더 큰 두려움, 불안, 분노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빈곤한 자아를 채우는 오만한 자의식


마미야는 기억 상실을 흉내 낸다. “여긴 어디지?”로 시작되는 그의 질문은 정말로 기억을 잃고 길을 잃은 후미에와 다르다. 자신이 어디 있고,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그는 자신을 숨기려 한다. 마미야가 던지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당황한다. 여기가 어디인지, 오늘은 며칠인지, 당신은 누구인지 묻는 마미야의 질문은 상대를 현재에 집중시킨다. 마미야를 처음 마주한 어두운 창고에서 타카베는 질문에 저항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내면의 심연을 헤매는 듯한 이 장면에서 마미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온다. 마미야는 복잡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저 타인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삶의 만족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기 연민과 자의식으로 가득 찬 내면이 있다. 내과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예전에는 내 안에 있었던 것이 지금은 전부 밖에 있어. 그래서 선생님 안에 있는 게 내게는 보여. 그 대신 나는 텅 비어 버렸어.” 최면을 통해 자신의 불안, 두려움 그리고 분노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발산하는 법을 터득한 마미야는 자기만의 자아실현을 한다. 오히려 자아가 초라하기에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마미야의 거대한 자의식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강화된다.


정말로 “텅 비어버린” 후미에는 이미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다. 첫 장면에서 후미에는 정신병원에서 동화 ‘푸른 수염’의 결말을 이야기하고 몸을 떤다. 스스로 자신의 금기를 깨뜨린 후미에는 자신을 잃음으로써 모두를 지키고 있다. 타카베가 ”왜 선량한 내가 고통받아야 하지? “ 고민하며 자기 연민을 느낄 동안 후미에는 남편이 자신을 떠나거나 버릴 것이란 압박감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빈곤한 자아는 타인을 채워줄 수 없다. 마미야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빈곤한 자아를 가진 타카베와 후미에는 서로를 착취한다. 후미에가 두 남자와 다른 점은 자의식조차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타인을 조종하려 하는 자는 위험하다. 메스머리즘의 전도사가 되어 충족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을 조종하며 얻는 오만한 만족감에 불과하다.  


메스머의 이론을 따르는 메스머리안들의 치유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통제력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만이 이 방법을 통해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상 이 모든 사건들은 사쿠마의 말대로 ”무의미“하다. 스스로 내면을 채우지 못하고 타인을 조종해 만족감을 느끼고 싶었던 마미야와 타카베가 적절한 도구와 합리화의 기반을 얻었을 뿐이다. 타인도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를 발산하고 두려움을 제거할 용기가 아니다.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배제된 세계에서 누군가의 분노에 조종당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식으로 채워진 초라한 자아의 망상이 이어지는 것을 무기력한 현대인은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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