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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Jul 27. 2023

공간을 점유한 남자의 행복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행복> (1965)


‘행복’이란 무엇일까? 섣불리 대답하기에 추상적인 질문이다. 아녜스 바르다는 범위를 좁혀 가정의 형태에 집중한다. 행복한 가정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 그 속을 들여다본다. 추상적이었던 행복이 보편적인 가정의 형상을 빌려 본질이 드러난다. 여기 이 남자,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헌신적인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젊고 생기 넘치는 애인을 가진 프랑수아는 부족한 것이 없다. 프랑수아는 ‘행복’하다. 가족의 모습은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지만 어딘가 불편하고 뒤틀려있다.  


순간순간의 만족감을 최대한 많이 느끼는 것이 행복이라면 만족스러운 공간을 가지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시공간 위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행복은 공간의 점유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테레즈와 아이들이 사는 집, 일터인 목공소 그리고 주말마다 소풍을 나가는 숲은 모두 프랑수아의 공간이다. 이내 새로운 공간이 더해진다. 우체국 직원 에밀리와 사랑에 빠진 프랑수아는 에밀리의 공간까지 영역을 넓힌다. 며칠 전 이사한 에밀리는 프랑수아에게 선반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프랑수아는 에밀리의 방에 선반을 설치하며 자신이 “일하는 동안 다른 데 가있”으라고 작업공간에서 에밀리를 내보낸다. 에밀리는 프랑수아의 허락을 받은 뒤에야 자신의 방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 모든 공간에서 프랑수아는 자유롭다. 그는 거리 곳곳을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도시마저도 프랑수아의 공간인 것처럼. 공간의 제한이 없기에 프랑수아는 행복할 수 있다.


아녜스 바르다는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허상을 공간의 분리를 통해 날카롭게 해부한다. 영화에서 집과 목공소는 각 성별로 분리된 대표적인 공간이다. 프랑수아는 목공소에서 나무를 재단하고 깎아 가구를 만든다. 테레즈는 집에서 원단을 재단하고 꿰매 옷을 만든다. 두 사람의 일은 다루는 재료만 다를 뿐 비슷한 면이 많다. 그러나 목공소와 집이라는 공간은 그들의 업무에 다른 사회적 성격을 부여한다. 목공소는 남자들이 술과 담배를 즐기며 유대를 쌓고 노동의 보람을 느끼는 공간이다. 테레즈의 재봉 업무 공간은 침실 옆에 마련된 작은 책상이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가사노동을 하는 동시에 작업을 한다. 업무공간은 한정적이며 외부의 침입이 쉽다. 드물게 일직 귀가한 프랑수아는 집에 찾아온 테레즈의 손님에게 무례하게 말하고, 새하얀 드레스를 페인트가 묻은 손으로 잡으려 한다. 집은 테레즈의 작업공간이지만 존중받기는 어려운 일터다.


친척 남자아이들을 위해 프랑수아는 작은 나무집을 지어준다. 테레즈는 얼마 전 태어난 이자벨이 인형놀이를 하기에 좋겠다고 말한다. 남자아이들은 사냥꾼의 오두막이라며 “여자는 출입금지”라고 못 박는다. 나무집이 형태를 채 갖추기도 전에 남자들은 공간을 점유한다. 남자들이 자신의 공간을 넓혀가고 있는 동안, 여자들은 아이를 안고 먹이며 돌보고 있다. 심지어 어린아이조차도. 성역할에 의해 철저히 분리된 공간과 역할은 가부장제 사회의 이상적이고 행복한 가족의 형태로 계승된다.


프랑수아는 “당신이 힘든 건 싫다”며 다정하게 말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성관계를 마친 부부의 침실신은 직접적으로 남자의 이중성을 강조한다. “이것도 쉬는 걸까?” 테레즈는 의문스럽다. 대상이 없는 의문은 갈 곳을 잃고 흩어진다. 집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는 테레즈의 일이다. <행복>은 도구화된 여성의 손길을 몽타주 시퀀스로 유려하게 그려낸다. 침구를 정돈하고, 빵을 만들고, 옷을 재단하고, 다림질을 하고, 식물을 가꾸고, 아이를 돌보는 여성의 손. 집안일을 돌보는 여성의 손길이 이어진 후에 문을 잠그는 프랑수아의 손과 얼굴이 나온다. 프랑수아는 얼굴을 드러내며 공간의 주인임을 밝힌다. 이 공간은 테레즈가 아니라 프랑수아에게 속해있다. 테레즈의 몸과 얼굴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손이 누구의 것이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프랑수아는 테레즈를 당연한 듯 “강인한 식물”에 비유한다. 테레즈가 뿌리내린 곳은 정확히 말하면 프랑수아의 마음이 아니라 집 그 자체다. 그리고 테레즈를 그곳에 뿌리내리도록 만든 사람은 프랑수아를 비롯한 사회다. “자유로운 동물”인 에밀리는 자신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있는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테레즈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개인의 취향은 밀려난다.


주말 아침 숲으로의 소풍은 이상적인 가족의 상징이다. 숲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명확히 분리된다. 남자들은 불을 피우고 여자들은 요리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오가는 아이들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이어진 듯 분리된 간극을 보여준다. 테레즈는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에게 커피를 따라준다. 프랑수아는 산책을 하거나 내킨다면 테레즈와 성관계를 가진다. 지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온 소풍에서도 여성은 역할과 공간에 종속되어 있다.


테레즈는 자신이 프랑수아와 집안을 관리하며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다. 사실은 그 반대다. 프랑수아는 자신과 집을 돌봐줄 손길을 바랐고 테레즈에게 이를 허락한 것이다. 테레즈는 프랑수아가 원하는 행복의 조건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테레즈는 어떤가? 테레즈에게 필요했던 행복의 조건은 프랑수아의 온전한 사랑이다. 프랑수아처럼 “행복은 덧셈”이라며 두 명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지 않는다. 테레즈에게 프랑수아의 사랑은 반쪽이 되어 돌아왔다. 프랑수아의 불륜은 테레즈에게 깨달음을 준다. 자신이 무엇도 온전히 가지지 못했다는 진실을 선명하게 마주한다. 두 사람의 암묵적인 계약은 깨어졌고, 공간도 마음도 점유하지 못한 테레즈는 호수에 몸을 던진다.


활짝 핀 해바라기 뒤로 4인 가족의 화목한 풍경이 흐릿한 실루엣으로 보인다. 자신의 행복에 변하지 않는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그 행복은 재고돼야 한다. 인류의 절반은 운 좋게도 그런 특권을 당연하게 누려왔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나 행복하지 않음이 아니다. 행복의 반대는 행복이 남의 손에 달려 있는 것, 즉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테레즈는 실존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사라졌다. 테레즈의 공간이었던 집은 에밀리의 손길로 대체된다. 테레즈는 한 점의 공간도 소유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프랑수아는 여전히 행복하다. 그의 공간과 가정은 아무런 흠결 없이 유지되고 있다. 프랑수아의 화분에는 새로운 식물이 심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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