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한다. 내 죽음을 선언하기 위하여. 직접 대면하여 말하고 싶다. 삶의 끝까지,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출처: 영화 <단지 세상의 끝>
말에 가시가 있다는 느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찾아본 영화다. 연극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의 대부분을 추리하게 한다. 주인공 루이에 대해 던져주는 단서란 오직,
34살의 유능한 작가.
동성애자.
12년 전 가족을 떠나 처음으로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
그가 12년 만에 가족을 찾게 된 이유 또한 아주 명확하지는 않고, 과연 그가 불안한 듯 시계를 쳐다보는 수 없이 많은 행동 뒤에 그가 간절히, 두려웁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가 지켜보는 것 또한 긴박감 넘치게 표현되었다.
루이는 어떤 이유에 의해 가족을 떠나 살았다. 12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삶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실 우리 삶에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환상에 불과할 뿐, 누구나 가족이라는 굴레에 얽혀있는 존재다. 가족에게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가 묵묵히 독백하던 순간 뒷자리 꼬마가 그의 눈을 가려버리는 순간, 그 아이의 순수함을 나무랄 수 없듯이, 자유를 갈구하고 싶어도 늘 떠나가는 모습을 창문 안에서만 바라보는 존재다.
출처: 영화 <단지 세상의 끝>
12년 만에 루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남보다도 어색한분위기가 연출된다. 여기서 흔하디 흔한 가정사로 치부되지 않고 다섯 인물 간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키는 데에는 카트린이라는 인물이 한 몫한다. 그녀는 루이가 부재하는 동안 가족의 일원이 된 사람으로서 어찌 보면 루이의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바라본 가족의 모습을 한 걸음 떨어져 이성적으로 바라봐 줄 수 있는 시선이 된다. 한편으로는 피를 나눈 가족보다도 루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들여다볼 줄 아는 이가 카트린이라는 외부인이라는 점에서 가족 간의 갈등을 더욱 점화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루이는 말하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만 루이를 이해하려 했다.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며 쉬잔은 가족에게 소원했던 루이를 원망했고, 장남의 책임과 부담감이 겹쳐져 있는 인물인 앙투안 또한 루이가 자신의 삶에 무관심했다고 생각했다. 루이 또한 앙투앙이 자신을 못된 놈이라 못 박아 두려 한다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해는 증폭되고 갈등은 풀려고 할수록 뭉쳐진 실타래처럼 자꾸만 엉켜 드는데도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모호하고 해결되지 않는 불분명한 관계성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러한 결말은 가족 본연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내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 인생의 모든 결정에 그들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가족'이란 그 아이러니함을 말이다. 생판 남이라면 다시 보지 않고 내 갈길을 가면 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 하나로 이해할 수는 없는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