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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쏭 Aug 05. 2022

둘째 아이 증후군

나의 내면아이 마주하기


첫 글의 제목이 '둘째 아이 증후군'이 될지는 몰랐다. 가족 단톡방이 있는데 오늘 점심시간에 두 가지 토픽이 있었다. 한 가지는 조카가 만든 종이 마스크였고, 한 가지는 내가 만든 햄버거였다. 카톡 사진이 거의 동시에 올라가서 겹쳐지기는 했는데 부모님은 조카가 만든 종이 마스크에만 멋지다 대단하다 칭찬하고 내가 만든 햄버거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언니랑 동생은 맛집이다 라며 이야기해줬다.) 평소라면 그냥 별생각 없이 넘겼을 텐데 요즘 나는 꽤나 예민한 상태다. 회사 일로, 공부로, 여러 가지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말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상했고 유치하지만 엄마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로 엄마 아빠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며 섭섭하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부모님은 당연히 무슨 소리냐며 밖이어서 메시지를 제대로 못 봤다고 이야기하셨지만 별로 답장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는 현재 영국에서 거주한 지 5년 차에 접어들었다. 4년을 꽉 채우고도 어느덧 5개월이 지났다. 해외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과거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인턴을 일 년 했던 경험이 있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었지만 일 년을 무사히 잘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인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서 정착하고자 애를 많이 썼다. 약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다시금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주변의 반대도 많았지만 영국 워킹홀리데이라는 면목으로 2년만 더 해외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이왕 해외에 나온 거 더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업 비자를 받게 되었다.


해외에 살다 보면 가족들과 자주 연락하는지, 가족들과 얼마나 가깝고 친밀한 지를 가까운 사람들과 종종 이야기하게 된다. 남자 친구의 경우에는 부모님이 매주 토요일 오전 열 시 즈음에 전화를 하신다고 한다. 남자 친구 본인은 할 이야기가 엄청 많지는 않다고는 하지만, 부모님이 해외 나간 아들이 통화하기 편할 시간을 생각하여, 매주 같은 시간에 전화하신다니 어쩐지 괜스레 부럽기도 했다. 우리 가족 단체 카톡방은 늘 시끄럽기는 하지만 부모님과의 통화는 보통 격주로 하는 것 같다. 뭐 사람마다 다 다르고 막상 나 역시도 부모님께 자주 전화를 드리는 것은 아니니, 괜히 아주 쓸데없이 이런 것까지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나는 딸 세 명 중의 중간인 둘째로 자랐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시면서 동시에 우리 세 딸을 양육하시느라 바쁘긴 바쁘셨다. 어릴 때 자라면서는 나의 결핍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2018년도 영국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종종 나 스스로 조차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나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영국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느끼기도 했고, 그로 인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눈치 볼 때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누구든 간에 어렵고 불편한 일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어쩌면 나에게 둘째 아이 증후군 혹은 착한 사람 증후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느껴진 적이 많았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려 노력 중이다.)




사실과 무관할 수 있으나 내가 기억하는 나는 어릴 때부터 늘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서 애를 썼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도 잘 해내는 아이였고, 공부든 운동이든 성경 공부이든 글쓰기 대회이든 무엇이든 간에 중상위권 이상으로 척척 잘하기는 했다. 교회 공동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별다른 흠 없이 나름의 사회관계를 잘 형성하며 자라왔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인 서울을 포기하고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 대학교를 스스로 선택한 것도 나였다. 이런 모든 성장 과정 속에서 부모님은 당연히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내가 잘 해낸 것들은 당연하게 잘해야만 했던 것 같고, 동생은 사소한 것 까지도 모두 칭찬받는 느낌이었다. 적어보니 너무 유치하긴 한데 사실과 무관하게 내가 느낀 바는 그러했다. 언니는 조카 두 명을 키우고 있는데 요즘 부모님의 여가 시간의 많은 부분을 조카들이 차지하기도 한다. 나는 우리 가족 모두를 정말 사랑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한 마음들이 치졸하고 옹졸한 마음인 줄 알지만 말이다. 첫째인 언니도 모르고 막내인 동생도 모르는 해외에 사는 둘째인 나의 마음들이다.


작년 추석에 한국을 방문해서 엄마 아빠 나 세 명이서 밤 산책을 한 시간이 있었다. 한국에 일 년 겨우 2주 방문하는 해외에 사는 딸이 되어서, 부모님과 가족들 관심의 중심이 된 기분이 내심 좋았다. 난 둘째로 중간에 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자랐다고 부모님에게 슬쩍 이런 말을 해보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나는 어릴 때부터 정말 강했고 오히려 언니나 막내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자라왔다고 하셨다. 문득, 어린이집 가기 전에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며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고집부려서 엄마가 출근을 몇 시간이나 늦게했던 어릴 적 기억이 아주 선명하고 또렷하게 떠올랐다. 네 살의 아이에게 언니도 있고 여동생도 있는 사실이란, 가만히 있으면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서로 다른 기억을 회상한 채로 추석 연휴는 계속되었다.




영국에서 내가 정말 친해진 영국인 친구가 한국에 살고 있다. 추석 연휴 중 하루는 그 친구를 데리고 다니며 우리 외가 친척들과 함께 지방에서 추석을 같이 보냈었다. 친구가 서울로 다시 돌아가야 해서 밤늦은 시각까지 우리 가족은 함께 친구를 배웅해주기 위해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려줬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엄마는 친구에게 "ㅇㅇ이가 (글쓴이 본인) 영국에 있을 때 잘 챙겨주고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라는 말을 친구에게 꼭 해달라고 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버렸다. 낯선 외국인을 잘해주고 싶은 그 부모님의 마음이, 단순히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나의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너무 당연한 이유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이란 이렇게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든 것이구나. 요란 법석을 떨며 표현하지 않을지라도 부모님은 그들의 방식대로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이야기 시작에 언급한 일명 카톡 사건은 가족들의 개별 연락으로 종결이 되었다. 엄마랑 아빠는 각자 서너 줄 되는 카톡을 보내왔다. 동생은 엄마가 내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다고 해명하라고 연락이 왔고, 언니는 아빠가 얘기했다며 전화가 왔다. 언니와 동생은 둘 다 섭섭하다고 하는 내가 조금 웃기기도 하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 듯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내심 신경이 많이 쓰이시는 듯했다. 그리고 엄마는 전화가 와서 도리어 요즘 많이 힘드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역시 나를 잘 알고 있다. 요즘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는 한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뭘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 하느냐, 건강이 최고다, 이왕 할 거면 즐겁게 하자, 웃으면서 삽시다 라며 훈훈하게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결국에 부모는 늘 자식의 영육 간의 건강과 행복을 바랄 뿐이고, 언니와 동생은 크면 클수록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평소에 늘 참기만 하다가 오래간만에 내 안에 있는 쪼잔함을 드러냈더니 약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주 사소한 것을 섭섭하다고 말할 수 있는, 뭘 그런 걸 가지고 섭섭해하냐 말할 수 있는. 그리고 금세 다른 이야기를 하기에 여념이 없는. 이 모든 것은 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가족이기에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둘째 아이 증후군은 여전히 극복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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